불교교리

[스크랩] 馬祖錄(사가어록 수록본)

희명화 2013. 2. 26. 18:25

마조록(馬祖錄)





사가어록 수록본
1. 행록
2. 시중
3. 감변

마조록(馬祖錄) / 四家語錄 - 1. 행록
강서(江西) 도일(道一:709-788)스님은 한주(漢洲) 시방현(什方縣)사람으로 성은 마(馬)씨이며 그 마을에 있는 나한사(羅漢寺)에 출가하였다. 용모가 기이하여 소걸음으로 걸었고 호랑이 눈빛을 가졌다. 혀를 빼물면 코끝을 지났고 발바닥에는 법륜 문신 두 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자주(資州) 당화상(唐和尙)에게 머리를 깎았고 투주(州) 원률사(圓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唐) 개원(開院:713-742) 연중에 (衡嶽)의 전법원(戰法院)에서 선정을 닦던 중 회양(懷讓:677-744)스님을 만났는데, 회양스님은 스님의 근기를 알아보고는 물으셨다.
"스님은 좌선하여 무얼하려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회양스님은 암자 앞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 갈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벽들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수레에 멍에를 채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스님이 대꾸가 없자 회양스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坐禪)을 배우느냐, 앉은 부처를 배우느냐. 좌선을 배운다고 하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데 있는지 않으며, 앉은 부처(坐佛)를 배운다고 하면 부처님은 어떤 모습도 아니다. 머뭄 없는 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리지 않아야만 한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며,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르침을 듣자, 스님은 마치 제호를 마신 둣하여 절하며 다시 물으셨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만 모습 없는 삼매(無相三昧)에 부합하겠습니까?"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를 배움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설함은 저 하늘이 비를 내려 적셔주는 것과도 같다. 그대의 인연이 맞았기 때문에 마침 도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물으셨다.
"도가 모습(色相)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수 있겠습니까?"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으니, 모습 없는 삼매도 그러하다."
"거기에 생성과 파괴가 있습니까?"
"생성이나 파괴, 모임과 흩어짐으로 도를 보는 자는 도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게송을 듣거라."
 심지(心地)는 모든 종자를 머금어
촉촉한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싹튼다
삼매의 꽃은 모습 없는데
무엇이 파괴되고 또 무엇이 이루어지랴
心地含諸種 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 何壞復何成

스님이 덕분에 깨우치게 되어 마음(心意)이 초연하였으며, 10년을 시봉하면서 그 경지가 날로 더하였다.
이에 앞서 육조(六祖:638-713)스님이 회양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인도 반야다라(般若多羅)가 예언하기를 '그대의 발 아래서 망아지 한 마리가 나와 세상 사람을 밟아 버리리라'하셨다"했는데, 스님을 두고 한 말씀이었을 것이다.
회양스님의 제자 여섯 사람 중에서 스님만이 심인(心印)을 비밀스러이 전수받았을 뿐이었다.
처음 건양(建陽)의 불적령(佛跡嶺)에서 임천(臨川)으로 옮겨갔고, 다음으로 남강(南康) 공공산(公山)에 이르렀으며, 대력(大曆:766-779) 연중에 종릉(鍾陵:洪州에 있음)이 있는 개원사(開元寺)에 이름을 걸어두셨다. 그때 대장군(連師)노사공(路嗣恭)이 가풍을 듣고 경모하여 종지(宗旨)를 직접 전수받았고, 이로부터 사방 납자들이 운집하였다.
회양스님은 스님이 강서에서 교화를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듣고 대중에게 물으셨다.
"도일(道一)이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느냐?"
"이미 대중을 위해 설법합니다."
그러자 회양스님은 말씀하셨다.
"도대체 소식을 전해오는 사람이 없구나."
그리고는 스님 하나를 그곳으로 보내며 "그가 상당하였을 때 '어떻습니까?' 하고 묻고 무슨 말을 하거든 기억해 오너라"고 하셨다.
그 스님이 분부대로 가서 물어더니 스님이 말씀하셨다.
"난리통 30년에 소금과 장은 줄여 본 적 없다."
그 스님이 돌아와 회양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회양스님은 "그렇군"하셨다.
스님의 입실제자(入室弟子) 139명은 각자 한 곳의 선지식이 되어 더더욱 끝없는 교화를 폈다.
스님께서는 정원(貞元) 4년(788) 정월 중에 건창(建昌) 석문산(石門山)에 올라 숲속을 거닐다가 평탄한 골짜기를 보더니 시자에게 말씀하셨다.
"썩어질 내 몸이 다음달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말씀을 끝내고 돌아와 이윽고 병을 보이므로 원주(院主)가 문안을 드렸다.
"스님께선 요즈음 건강이 어떠하신지요."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라."
2월1일, 목욕하고 가부좌한 채 입멸(入滅)하셨다. 원화(元和:806-820) 연중에 대적선사(大寂禪師)라 시호하고, 탑은 대장엄(大藏嚴)이라 하였다.

마조록(馬祖錄) / 四家語錄 - 2. 시중
1.
스님께서 대중에게 설법(示衆)하셨다.
"그대들 납자여, 각자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도록 하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달마대사가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중국에 와 상승(上乘)인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는 「능가경」을 인용하여 중생의 마음바탕을 확인(印)해 주셨으니, 그대들이 완전히 잘못 알아 이 일심법(一心法)이 각자에게 있음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능가경」에서는 '부처님 말씀은 마음(心)으로 종(宗)을 삼고, 방편 없음(無門)으로 방편(法門)을 삼는다. 그러므로 법을 구하는 자라면 응당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따로 마음 없기 때문이다'하셨다.
선이라 해서 취할 것도 없고 악이라 해서 버릴 것도 없으며, 깨끗함과 더러움 두쪽 다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죄의 본성이 공(空)임을 통달하면 생각생각 어디에도 죄를 찾을 수 없으니 그 성품(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계가 오직 마음일 뿐(三界唯心)이며, 삼라만상이 한 법에서 나온(印)것이이다.
형상(色)을 볼 때, 그것은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인데, 마음은 그 자체가 마음이 아니라 형상을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황따라 말하면 될 뿐, 현상이든(卽事)이치에든(卽理) 아무 걸릴 것이 없다.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나온(生) 것을 형상(色)이라 하는데, 색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난 것은 동시에 난 것이 아니다.
이 뜻을 확실히 알아야 그때그때 옷 입고 밥 먹으면서 부처될 씨앗(聖胎)을 길러내고 인연따라 시절을 보내게 되리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마음 바탕을 때에 따라 말하니
보리도 역시 그러할 뿐이라네
현상이나 이치에 모두 걸릴 것 없으니
나는 그 자리가 나지 않는 자리라네
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碍 當生卽不生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를 닦는 것입니까?"
"도는 닦는 데 속하지 않는다. 닦아서 체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었으니 다시 부서져 성문(聲聞)과 같아질 것이며,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성(自性)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 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修道人)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며 공(空)을 관찰하여 선정에 들어가면 바로 유위(有爲)에 떨어진다 하겠다. 게다가 밖으로 치달아 구하면 더더욱 멀어질 뿐이니 3계의 심량(心量)을 다 없애도록만 하라. 한 생각 망념이 3계 생사의 근본이니, 일념이 없기만 하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法王)의 위 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될 것이다.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범부는 망상심, 즉 거짓과 삿됨, 아만(我慢)과 뽐냄이 합하여 한덩어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여러 법이 모여 이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일어날 때는 법만 일어날 뿐이며, 멸할 때도 법만 멸할 뿐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이 일어날때 내(我)가 일어난다 하지 않으며, 멸할 때도 내가 멸한다 하진 않는다.
전념(前念)·후념(後念)·중념(中念)이 생각생각 서로 의지하지 않아서 생각생각 고요함(寂滅)을 해인삼매(海人三昧)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일체법을 다 포섭한다. 마치 백천 갈래 물줄기가 함께 큰 바다로 모여들면 모두 바닷물이라 이름하는 것과도 같다. 한 맛(一味)에 여러 맛이 녹아 있고 큰 바다에 모든 물줄기가 섞여드니, 마치 큰 바다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물을 다 쓰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성문은 깨달았다 미혹해지고 범부는 미혹에서 깨닫는다. 성문은 성인의 마음에는 본래 수행지위·인과·계급 등 헤아리는 망상이 없음을 모른다. 그리하여 인(因)을 닦아 과(果)를 얻고, 8만겁(八萬劫)·2만겁(二萬劫) 동안을 공정(空定)에 안주하니, 비록 깨닫긴 했으나 깨닫고 나서는 다시 미혹한 것이다. 또한 모든 보살은 저 지옥 고통을 보면 공적함(空寂)에 빠져 불성을 보지 못한다. 상근기 중생이라면 홀연히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말끝에 깨닫고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서 본성을 단박에 깨닫는다. 그러므로 경에서 '범부에게서는 엎치락 뒤치락하는 마음이 있지만 성문에게는 그것이 없다'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미혹에 상대하여 깨달음을 설명하였지만 본래 미혹이 없으므로 깨달음도 성립되지 않는다.
일체 중생들은 무량겁 이래로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벗어나지 않고 영원히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말하고 대꾸하는 6근(六根)의 작용과 모든 행위가 모조리 법성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서 명상(名相)을 좇으므로 미혹한 생각(情)이 허망하게 일어나 갖가지 업(業)을 지으니, 가령 한 생각 돌이켜본다면(返照) 그대로가 성인의 마음이다.
여러분은 각자 자기 마음을 깨치면 될 뿐 내 말을 기억하지말라. 설사 항하사만큼 도리를 잘 설명한다 해도 그 마음은 늘지 않으며, 설명하지 못한다 해도 그 마음은 줄지 않는다. 또한 설명을 해도 그대들의 마음이며, 설명하지 못해도 그대들의 마음이다. 또 몸을 나누고 빛을 놓으며 18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해도 나에게 불꺼진 재를 갖다 주느니만 못하다. 장마비가 지난 뒤 꺼진 재에 불기가 없는 것은 성문이 허망하게 인을 닦아 과를 얻음에 비유할 만하며, 장마비가 아직 지나지 않아 꺼진 재에 불기운이 있는 것은 보살의 도업(道業)이 순수하게 익어 모든 악에 물들지 않음을 비유할 만하다.
만일 여래의 방편인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말하자면, 쇠사슬같이 끊김이 없어 항하사겁토록 설명해도 다하지 못하겠지만,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면 아무 일도 없게 된다. 오랜동안 서 있었으니 이만 몸 조심하라."
3.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이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경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범부의 행동도 아니고 성현의 행동도 아닌 이것이 보살행이다.'
지금 하는 일상생활과 인연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이 모든 것이 도(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法界)이며 나아가서는 향하사만큼의 오묘한 작용까지도 이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심지법문을 말하며, 무엇 때문에 다함 없는 법등(法燈)을 말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일체법은 모두가 마음법이며, 일체의 명칭은 모두가 마음의 명칭이다. 만법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왔으니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서도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이 통달하였으므로 사문(沙門)이라한다'고 하였으니, 이 본원자리에서는 명칭도 평등하고 의미도 평등하며 일체법이 다 평등하여 순수하여 잡스러움이 없다.
만일 교문(敎門)에서 시절따라 자유롭게 법계를 건립해 내면 모조리 법계이고, 진여(眞如)를 세우면 모조리 진여이며, 이치(理)를 세우면 일체법이 이치이며, 현상(事)을 세우면 일체법이 현상이 된다. 하나를 들면 모두 따라와 이사(理事)가 다름이 없이 그대로 오묘한 작용이며, 더 이상 다른 이치가 없다. 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다. 비유하면 달그림자에는 차이가 있으나 달 자체는 차이가 없고, 여러 갈래 물줄기는 차이가 있으나 그 물의 본성은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삼라만상은 차이가 있으나 허공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도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으나 걸림 없는 지혜는 차이가 없듯이 갖가지로 세운 법이 모두 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세워도 되고 싹 쓸어 버려도 된다. 모조리 오묘한 작용이며 그대로가 자기이니, 진(眞)을 떠나서 세울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운 그 자리가 바로 진이며, 다 자기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냐.
일체법이 불법이고 모든 법이 바로 해탈인데 해탈이 바로 진여이나, 모든 법은 진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이 모두 불가사의한 작용으로서 시절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경에서도 '곳곳마다 부처님 계신 곳'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매우 자비로우며 지혜가 있어 선한 본성으로 일체 중생의 얽힌 의심을 부수어 유무(有無)등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망정이 다하고 인집·법집(人·法)이 함께 공하여 비할 바 없는 법륜을 굴리고 모든 테두리(數量)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일마다 걸림이 없고, 현상·이치 양쪽 다 통하니 마치 하늘에 구름이 일어났다가 어느덧 없어지듯 머문 자취를 남기지 않으며, 물에다 그림을 그리듯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대적멸(大寂滅)이다.
번뇌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이름한다. 법신은 무궁하여 그 자체는 늘고 줄음이 없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모나고 둥글기도 하면서 대상에 따라 형체를 나타내니 물에 비친 달처럼 잔잔하게 흔들거리며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유위(有爲)를 다하지도 않고 무위(無爲)에 머물지도 않으니 유위는 무위의 작용이며, 무위는 유위의 의지처이다. 의지처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의지할 것 없는 허공과 같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심생멸(心生滅)과 심진여(心眞如)라는 뜻에서 보자. 심진여(心眞如)라 하는 것은 밝은 거울이 물상을 비추는 것과도 같은데, 거울은 마음에 비유되고 물상은 모든 법에 비유된다. 여기에서 마음으로 법을 취한다면 바깥 인연에 끄달리게 되니 그것이 심생멸의(心生滅義)가 된다.
성문은 소리를 들음으로써 불성을 보고 보살은 눈으로 불성을 보니 그것이 둘 아님을 아는 것을 평등한 성품이라 한다. 이 성품은 차이가 없으나 작용은 같지 않아서 미혹에 있으면 식(識)이 되고, 깨달음에 있으면 지(智)가 되며, 이치(理)를 따르면 깨달음이 되고, 현상(事)을 따르면 미혹이 된다. 그러나 미혹해도 자기 본심에 미혹하는 것이며 깨달아도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 다시는 미혹되지 않으니, 마치 해가 뜸과 동시에 어둠은 없어지듯 밝은 지혜가 나오면 어두운 번뇌는 공존할 수 없다.
마음(心)과 경계(境)를 깨달으면 망상이 발생하지 않으며, 망상이 나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무생법인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어서 도를 닦고 좌선할 필요가 없으니 닦을 것도 없고 좌선할 것도 없는 이것이 바로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다.
이제 이 이치를 알았으면 진정코 모든 업을 짓지 말고 본분따라 일생을 지내도록 하라. 가사 한 벌 누더기 한 벌로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계행(戒行)을 더욱 훈습하고 정업(淀業)을 더욱 쌓도록 하라.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깨닫지 못할까 무얼근심하랴. 듣느라고 수고하였다. 몸 조심하라."

마조록(馬祖錄) / 四家語錄 - 3. 감변
1.

서당 지장(西堂智藏:735-814)· 백장 회해(百丈懷海:749-814)· 남전보원(南전 普願: 748-834)스님이 마조스님을 모시고 달구경을 하던 차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지금같은 땐 무얼 했으면 좋겠는가?"
서당스님은 "공양하기에 딱 좋군요"하였고, 백장스님은 "수행하기에 좋겠습니다"하였다. 남전스님이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 버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경(經)은 장(藏:서당)으로 들어가고, 선(禪)은 바다(海:백장)로 돌아가는데, 보원(普願:남전)만이 사물 밖으로 벗어났구나."
2.
남전스님이 대중에게 죽을 돌리는데 스님께서 물으셨다.
"통 속은 무엇이냐?"
"닥치거라. 이 늙은이야! 무슨 말이냐."
스님께서는 그만 두셨다.
3.
백장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의 근본 뜻입니까?"
"바로 지금 그대가 신명을 놀리는 자리라네."
4.
대주 혜해(大珠慧海)스님이 처음 스님을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어디서 오느냐?"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옵니다."
"여기에 와서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
"불법을 구하려 합니다."
"자기의 보배창고(寶藏)는 살피지 않고서 집을 버리고 사방으로 치달려 무엇하려느냐. 여기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무슨 불법을 구하겠느냐?"
대주스님은 드디어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 혜해(慧海)의 보배창고입니까?"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그대의 보배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작용이 자유 자재하니 어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대주스님은 말끝에 본래 마음은 깨달음(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뛸듯이 기뻐하며 절을 하였다.
6년을 섬긴 뒤에 돌아가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門論)」1권을 지었는데, 스님께서 보더니 대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월주에 큰 구슬(大珠)이 있는데 뚜렷하고 밝은 광채가 자재하게 사무쳐 막히는 곳이 없다.
5.
늑담 법회(潭法會)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스님께서는 나지막히 속삭였다.
"이리 가까이 오게."
법회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자 한 대 후려치면서 말씀하셨다.
"셋이서는 함께 역모를 꾸미지 않는 법이라네, 내일 찾아오게."
법회스님은 다음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은 돌아가고 내가 상당할 때를 기다렸다가 나오게.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네."
법회스님은 여기서 깨닫고 말하였다.
"대중의 증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법당을 한 바퀴 돌더니 가버렸다.
6.
늑담 유건(潭維建)스님이 하루는 법당 뒤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스님이 보시고는 그의 귀에 입을 대고 두 차례 훅하고 불자 유건스님은 선정에서 일어나 스님임을 알고는 다시 선정에 들었다.
스님은 방장실로 돌아가 시자더러 차 한 그릇을 갖다주게 하였는데, 유건스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큰 방으로 가버렸다.
7.
석공 혜장(石鞏慧藏)스님은 출가 전에 본래 사냥을 일삼았으며 사문을 싫어하였다. 한번은 사슴떼를 쫓다가 마침 스님의 암자 앞을 지나게 되었다. 스님이 그를 맞이하자 그는 물었다.
"스님은 사슴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지요?"
"그대는 무얼하는 사람이냐?"
"사냥꾼입니다."
"활을 쏠 줄 아는가?"
"쏠 줄 압니다."
"화살 한 발로 몇 마리를 잡는냐?"
"한 발로 한 마리를 잡습니다."
"활을 쏠 줄 모르는구나."
"스님께선 활을 쏠 줄 아십니까?"
"쏠 줄 알지."
"스님께서는 화살 한 발로 몇 마리나 잡으십니까?"
"한 발로 한 떼를 다 잡는다네."
"저놈들도 생명입니다. 무엇 때문에 한 떼나 잡겠습니까?"
"그대가 그런 줄 안다면 왜 스스로를 쏘지 않느냐?"
"저더러 스스로 쏘라 하신다면 쏘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호통을 쳤다.
"이놈! 광겁(曠劫)의 무명번뇌(無名煩惱)를 오늘 단박 쉬도록 하라."
그는 그 자리에서 활과 화살을 꺾어버리고 스스로 칼로 머리카락을 자르더니 스님께 출가하였다. 하루는 부엌에서 일을 하는데 스님께서 물으셨다.
"무얼 하느냐?"
"소를 칩니다."
"어떻게 치는데?"
"한 차례 풀밭으로 들어가면 바로 콧구멍을 꿰어 끌고 옵니다."
"그야말로 소를 잘 먹이는구나."
8.
한 스님이 가르침을 청하였다.
"스님께선 4구백비(四句百非)를 쓰지 말고 저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장 지적해주십시오."
"오늘은 생각 없으니 그대는 지장(智藏)에게 가서 묻도록 하라."
그리하여 지장스님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스님께서 저더러 스님(上座)께 가서 물으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지장스님은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말하였다.
"오늘은 머리가 아프다. 그러나 회해 사형에게 가서 묻도록 하라."
그리하여 다시 회해(懷海)스님에게 가서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도 잘 모르는 일인데."
그 스님이 이리하여 스님(마조)께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장의 머리는 하얗고 회해의 머리는 검구나."
9.
마곡 보철(麻谷寶徹)스님이 하루는 스님을 따라가면서 물었다.
"무엇이 대열반입니까?"
"급하다."
"무엇이 급하다는 말입니까?"
"저 물을 보아라."
10.
대매산(大梅山) 법상(法常:752-839)스님이 처음 참례하고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바로 마음이 부처다(卽心卽佛)."
법상스님은 그 자리에서 깨닫고는 그때부터 대매산에 머물렸다.
스님은 법상스님이 산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는 한 스님을 시켜 찾아가 묻게 하였다.
"스님께선 마조스님을 뵙고 무엇을 얻었기에 갑자기 이 산에 머무십니까?"
"마조스님께서 나에게 '바로 마음이 부처다'하였다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다네."
"마조스님 법문은 요즈음 또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즈음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십니다."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돈시키는구나. 너는 네맘대로 비심비불(非心非佛)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실(梅實)이 익었구나."
11.
분주 무업(汾州無業:780-821)스님이 스님을 참례하였다.
스님께서는 그의 훤출한 용모와 종소리같이 우렁찬 목소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높고 높은 법당(佛堂)이나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
무업스님이 절하고 끓어앉아서 물었다.
"3승(三乘) 교학은 그 이론을 대략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문 (禪門)에서는 항상 바로 마음이 부처라고 하니,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무업스님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찾아와 가만히 전수하신 심인(心印)입니까?"
"그대는 정말 소란을 피우는군. 우선 갔다가 뒤에 찾아오게."
무업스님이 나가는 차에 스님께서 불렀다.
"여보게!"
무업스님이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무엇인가?"
무업스님이 딱 깨닫고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둔한 놈아! 절은 해서 무엇하느냐."
12.
등은봉(鄧隱峯)스님이 스님을 하직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디로 가려느냐?"
"석두(石頭)스님에게 가렵니다."
"석두로 가는 길은 미끄럽네."
"장대나무를 짚고 가다가 장터를 만나면 한바탕 놀다 가겠습니다."
바로 떠나 석두스님에게 도착하자마자 선상을 한 바퀴 돌더니 지팡이로 한번 내려치고 물었다.
"무슨 소식인고."
그러자 석두스님은, "아이고, 아이고!" 하였다.
등은봉스님은 말이 막혔다. 돌아와서 말씀드렸더니 스님(마조)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다시 가서 그가 '아이고, 아이고' 하거든 '허허(噓噓)'하고 두 번 소리를 내거라."
등은봉스님이 다시 가서 앞서 했던 그대로 물었더니 석두스님은 이에"허허"하고 두 번 소리를 내었다.
등은봉스님은 이번에는 말이 막혔다. 돌아와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말하였다.
"석두로 가는 길은 미끄럽다. 하지 않았더냐."
13.
등은봉스님이 하루는 흙 나르는 수레를 미는데 스님은 다리를 쭉펴고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스님, 다리 좀 오무리세요."
"이미 폈으니 오무릴 수 없네."
"이미 가고 있으니 물러나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수레바퀴를 굴리며 지나가다가 스님의 다리를 다치게 했다. 스님께서는 법당으로 돌아와 도끼를 집어들고 말하였다.
"조금전에 바퀴를 굴려 내 다리를 다치게 한 놈은 나오너라."
등은봉스님이 나와 스님 앞에 목을 쓱 빼자 스님은 도끼를 치웠다.
14.
석구(石臼)스님이 처음 스님을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어디서 오는가?"
"오구(烏臼)스님에게서 옵니다."
"오구는 요즈음 어떤 법문을 하던가?"
"여기서 몇 사람이나 아득해(茫然) 있습니까?"
"아득함은 우선 그만두고 간단한(然) 한마디는 무엇이더냐?"
석구스님이 이에 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오구를 일곱 대 때릴 일이 있는데 그대는 기꺼이 받겠는가?"
"스님께서 먼저 맞으십시오. 그런 뒤에 기꺼이 오구스님에게 둘려 드리겠습니다.
15.
양좌주(亮座主)가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좌주는 경론(經論)을 훌륭히 강의해 낸다고 들었는데 그런가?"
"부끄럽습니다."
"무얼 가지고 강의하는가?"
"마음으로 강의합니다."
"마음(心)은 재주부리는 광대같고, 의식(意)은 광대놀이에 장단을 맞추는 자와 같다. 그것으로 어떻게 경을 알 수 있겠는가?"
양좌주는 언성을 높혔다.
"마음이 강의하지 못한다면 허공이 강의합니까?"
"오히려 허공이 강의할 수 있다."
양좌주는 수긍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계단을 내려 가려하는데 스님께서 "좌주!"하고 불렀다.
양좌주는 머리를 돌리는 순간 활연대오하고 바로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둔한 중아! 절은 해서 무얼 하느냐."
양좌주는 절로 되돌아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논강은 남이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오늘에야 마조대사에게 한 번 질문을 받고서 평생했던 공부가 얼음 녹듯 하였다."
그리고는 서산(西山)으로 들어가 다시는 종적이 없었다.
16.
홍주 수노(洪州水老)스님이 처음 스님을 참례하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절 한번 하라"
수노스님이 절하자마자 스님께서 별안간 한 번 걷어찼다. 여기서 수노스님은 크게 깨닫고 일어나면서 손뼉을 치고"하하"웃으면 말하였다.
"그것 참 신통하고나, 신통해. 백천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털끌 하나에서 그 근원을 알아버렸도다."
그리고는 절하고 물러났다.
그 뒤 대중에게 말하였다.
"마조스님에게 한 번 채인 뒤로 지금까지 웃음이 그치질 않는구나."
17.
방거사(龐居士)가 스님께 물었다.
"만법에게 짝이 되어주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가 한 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다 마시면 그때 가서 말해주겠소."
다시 방거사가 물었다.
"본래인(本來人)을 어둡게 하지 말고 스님께서는 눈을 높이 뜨십시오."
스님께서 눈을 아래로 홀깃 하자 거사가 말하였다.
"일등가는 줄 없는 거문고를 스님만이 오묘하게 뜯는군요."
스님께서 이번에는 위로 홀깃 보자 거사는 절을 하였다.
스님께서 방장실로 돌아가자 거사는 뒤따라 들어가면서 말하였다.
"조금 전엔 잘난 체하다가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물은 근육은 뼈도 없으나 만 섬 실은 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이치가 어떻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 근육과 뼈를 말하는가."
18.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말을 하십니까?"
"어린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 그러네."
"울음을 그쳤을 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비심비불(非心非佛)이지."
"이 둘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지도하시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
"그 가운데서 홀연히 누군가 찾아온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무엇보다도 큰 도를 체득하게 해주겠다."
19.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바로 그대의 뜻은 어떤가?"
20.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도에 계합하겠습니까?"
"나는 아직 도에 계합하지 못하였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스님께서는 별안간 후려치면서 말씀하셨다.
"그대를 후려치지 않는다면 제방에서 나를 비웃겠지."
21.
탐원산(耽源山)에 젊은 스님 하나가 있었는데 행각하고 돌아와 스님 앞에서 원상(圓相)을 그리고는 그 위에다 절하고 서자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부처가 되고 싶지 않은가?"
"저는 눈을 비빌 줄 모릅니다."
"내가 졌다."
젊은 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22.
한 스님이 스님 앞에다 하나는 길게, 셋은 짧게 네 획을 긋고는 말하였다.
"하나는 길고 셋은 짧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사구백비(四句百非)를 떠나 대답해 주십시오."
그러자 스님께서는 땅에다 금 하나를 획 긋고는 말씀하였다.
"길다 짧다 말하진 못한다. 그대에게 답변을 끝냈다."
23.
스님께서 한 스님을 시켜 경산 법흠(徑山法欽:714-792)스님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일원상(一圓相)이 그러져 있었다.
경산스님은 뜯자마자 붓을 찾아 가운데 한 점을 찍었다.
그 뒤 어떤 스님이 혜충국사(慧忠國師: ?-775)에게 이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국사는 말하였다.
"법흠스님이 오히려 마조대사에게 속았구나."
24.
한 강사(講師)가 찾아와서 물었다.
"선종에서는 어떤 법을 전수합니까?"
스님께서 되물었다.
"강사는 어떤 법을 전해 주는가?"
"외람되게도 20여본(本)의 경론을 강의합니다."
"그렇다면 사자(獅子)가 아닌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스님께서 "어흠!"하고 소리를 내자 강사가 말하였다.
"이것이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스님께서 잠자코 있자 강사가 말하였다.
"이것도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 속에 있는 법입니다."
"나오지도 않고 들어앉지도 않는 것은 무슨 법인가?"
강사는 대꾸가 없었다. 드디어 하직을 하고 문을 나오는데 스님께서 "좌주여!"하고 불렀다. 강사가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무엇인가?"
강사가 역시 대꾸가 없자 스님께서는 "이 둔한 중아!"하셨다.
25.
홍주(洪州) 염사(廉使)가 물었다.
"술과 고기를 먹어야 옳습니까, 먹지 않아야 옳습니까?"
"먹는 것은 그대의 국록(國祿)이며, 먹지 않는 것은 그대의 불복(佛福)입니다."
26.
약산 유엄(藥山惟儼:745-828)스님이 처음 석두스님을 참례한 한 자리에서 물었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라면 제가 대략은 압니다. 남방에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한다는 소문은 늘 들었는데 정말 알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스님께선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석두스님이 말하였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되며, 이렇게 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음 둘다 안된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석두스님이 말하였다.
"그대의 인연은 여기에 있질 않으니 그만 마조스님의 처소로 가보게."
약산스님이 명을 받들어 스님께 공손히 절을 하고는 앞에 물었던 것을 그대로 묻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때는 그에게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작이게 하며, 어느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어떤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떠한가?"
약산스님이 말끝에 깨치고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였다.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나에게 절을 하느냐?"
"제가 석두스님 처서에서는 무쇠소 등에 달라붙은 모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되었다면 잘 간직하게."
그 뒤 3년 동안 시봉을 하였는데 하루는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요사이 견처(見處)가 어떠한가?"
"껍데기는 다 벗겨지고 알맹이 하나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대의 경지의 마음(心體)이 순조로와 사지(四肢)까지 편안하다 하겠다. 그렇게 되었을진대 어째서 세 가닥 대테(蔑; 중국의 한 은사는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뱃속이 터질까 걱정하여 대나무테로 배를 싸고 다녔다. 여기서는 공부가 완숙된 경제를 말한다)로 아랫배를 조르고 아무데나 가서 주지살이를 하지 않는가?"
"제가 무어라고 감히 주지노릇한다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네. 항상 다니기만 하고 머물지 말라는 법은 없고, 항상 다니기만 하고 다니지 말라는 법도 없다네. 이익되게 하고 싶어도 이익될 것이 없고, 위하려 하나 위할 것도 없다네. 배(船)를 만들어야지. 이 산에 오래 머물지 말게."
이리하여 약산스님은 스님을 하직하였다.
27.
단하 천연(丹霞天然:739-824)스님이 두번째 스님을 참례하러 왔을 때였다. 아직 참례하기도 전에 바로 큰 방에 들어가 나한상의 목을 말타듯 타고 앉았다. 그러자 대중들이 경악하여 급히 스님께 아뢰었다. 스님께서 몸소 큰 방으로 들어가 그를 살펴보더니 말씀하셨다.
"천진한(天然) 내 아들이로군."
단하 스님은 즉시 땅으로 내려와 절하며
"대사께서 법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천연(天然)'이라 이름하였다.
28.
담주 혜랑(潭州慧郞)스님이 처음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찾아와서 무엇을 구하느냐?"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구합니다."
"부처님에게는 지견이 없다. 지견은 마군일 뿐이다. 그대는 어디서 왔느냐?"
"남악(南嶽)에서 왔습니다."
"그대가 남악에서 오긴 했으나 아직 조계의 심요(心要)를 모르는구나. 속히 그 곳으로 되돌아가야지. 다른 데로 가서는 안된다."
29.
스님께서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호남에서 왔습니다."
"동정호(洞庭湖)에는 물이 가득 찼더냐?"
"아닙니다."
"때맞은 비가 그렇게나 내렸는데도 아직 가득 차지 않았더냐..."
도오(道吾)스님은"가득찼다"하였고, 운암(雲岩)스님은"담담하다"하였으며, 동산(洞山)은 "어느 겁(劫)엔들 모자란 적이 있었으랴"하였다.
출처 : 해탈지견향
글쓴이 : Hyang-poo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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