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일여(寤寐一如)는 과연 가능한가?
-오매일여의 진실과 곡해
윤창화(민족사 대표)
1. 시작하는 말
‘오매일여(寤寐一如)’란 ‘깨어 있을 때(寤)나 잠잘 때(寐)나 하나’ 즉 ‘불이(不二)’라는 뜻으로, 다른 말로는 ‘오매항일(寤寐恒一)’ ‘오매상일(寤寐常一)’ 또는 ‘몽교일여(夢覺一如)’라고도 한다. 그 뜻은 첫째, ‘오(寤)와 매(寐)를 하나로 보라.’ 즉 ‘오와 매를 분별하지 마라.’라는 뜻이고, 둘째, ‘오매불망 자나 깨나 한결같이 참구하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오매일여에 대하여 근래 참선자들 사이에서 원래의 뜻과는 상당히 달리 해석하여 실제로 화두를 들고 있는 상태, 즉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똑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낮에는 물론이지만 밤에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를 놓거나 망각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오매일여가 되지 못하면 그것은 아직 완전한 깨달음(頓悟)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하여 오매일여를 깨달음의 척도로 삼고 있다.
‘오매일여’ ‘오매항일’ ‘오매상일’ 또는 ‘몽교일여’라는 말은 선어록에 종종 등장한다. 그런데 당송(唐宋) 시대 어록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는데, 몽산 화상 등 원대(元代) 이후 선승들의 어록에서 비교적 많이 등장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선승들의 어록에서 자주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매일여’란 ‘오와 매를 따로 보지 말고 하나로 보라(寤寐不二)’ ‘오와 매에 대하여 분별하지 마라. 분별하면 그것은 망상이다.’ 또는 화두참구의 상징적인 의미로서 ‘자나 깨나 지극정성으로 참구하라.’ ‘일심으로 간절히 참구하라.’는 뜻의 오매일여가 이와 같이 깨달음을 가늠하는 잣대로 변질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오매일여에 대하여 그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근래에는 성철 스님(1911~1993)이 지은 선문정로(오매일여)와 백일법문(하권 263쪽 오매일여)의 영향이고, 멀리는 원나라 때 선승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의 영향이다.
선승 가운데 처음으로 ‘오매일여’ ‘오매항일’에 대하여, 즉 오매일여의 실제적 사실 여부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두고 집중적으로 고찰했던 사람은 간화선을 대성시킨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이다. 그리고 경전으로는 능엄경 10권 <상음변마(想陰辨魔)>장에 처음으로 ‘오매항일(寤寐恒一)’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용어는 다 똑같지만 사용하고 있는 뜻이나 용도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성철 스님은 오매일여를 화두참구에 적용시켜서 “숙면 속에서도 화두를 놓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여 실제적 단정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대혜종고는 “오매를 둘로 보지 마라.”라고 하여 ‘오매불이’의 의미로, 능엄경에서는 “낮에는 생각이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가 오매일여”라고 말하고 있다.
몽산 등 기타 선승들의 표현은 문학적, 상징적이라서 사람에 따라서는 달리 받아들일 소지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선문정로 오매일여장에서 인용하여 전거로 제시한 문헌(어록과 경전)을 재검토하면서 오매일여의 진실과 오해, 그리고 오매일여는 실제 가능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순서를 바꾸어 최근의 자료부터 검토하겠다.
2. 본격적 검토
1) 성철 스님 저 선문정로 오매일여장
여하(如何)히 대오하고 지견이 고명한 것 같아도 실지경계에 있어서 숙면 시에 여전히 암흑하 면 이는 망식(妄識)의 변동(變動)이요 실오(實悟)는 아니다. 그러니 수도자는 반드시 오매일여의 실경(實境)을 투과하여야 정오(正悟)케 된다.
오매일여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서 돈오견성이라고 자부한다면 이는 자오오인(自誤誤人)의 대죄과(大罪過)이며, 수도 과정에 있어서 가공할 병통이요 장애이다.
참선 오도에는 오매일여의 통과를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만일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 니며 오도(悟道)가 아니다.
그러나 몽중일여가 되면 벌써 화엄(華嚴) 칠지(七地)며 숙면일여가 되면 팔지(八地) 이상이다. 선문 (禪門)의 정안(正眼) 종사(宗師)치고 이 오매일여의 현관(玄關)을 투과하지 않고 견성이라고 한 바는 없으며 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후에서 개오하였으니 구경각(究竟覺)이 아닐 수 없다.
선문정로 오매일여장에서 정의하고 있는 오매일여란 “실제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낮(깨어 있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밤에 깊은 잠 속에서도 참구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만일 잠 속에서 화두를 놓치거나 망각, 또는 상실한다면 그것은 아직 공부가 덜 된 증거라는 것이다. 즉 화두참구가 실제 오매일여의 경지가 되어야만 깨닫게 되는 것임과 동시에 완전히 깨달은 것(돈오)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철 스님은 평소 납자들에게도 “오매일여가 되었느냐? 오매일여가 되지 못했다면 아직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 몽산법어 <시총상인(示聰上人)>장
(1) 마치 맑은 가을 하늘, 냇가에 흐르는 물과 같고, 옛 사당 안의 향로와 같이 하여, 적적성성(寂 寂惺惺)하게 하여 모든 생각이 다 끊어지면(心路不行), 그때에는 자신의 육신이 존재하고 있음도 의식하지 못하며(不知有幻身 在人間), 오로지 화두만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번뇌 망상은 곧 쉬게 되고 마음의 광명은 발하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만일 여기에서 지각심(知覺心,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화두참구의) 순일(純一)한 묘(妙)가 끊어지게 되리니(즉 화두참구가 계속되지 못하고 단절된다는 것) 크게 해로울 것이다.
(2) 이러한 허물(지각심)이 없는 사람은 동정일여(動靜一如)하고, 자나(寤) 깨나(寐) 성성(惺惺=寤 寐一如)하여 화두가 앞에 나타나게(話頭現前) 되는데,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서 여울물 속에서 도 활발발(活潑潑, 살아 있음)해서, 손가락을 대도 흩어지지 않으며 세게 쳐도 흩어지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마음이 고요하여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며 밖의 흔들림에도 부동하게 되리니, 이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의단이 파(破)해져서(화두가 타파되어서) 곧 정안(正眼)이 열리게 될 것이다.
오매일여에 대한 몽산법어의 표현은 매우 문학적이다. 사실 선문정로 오매일여 장에서 말하고 있는 화두참구의 3단계 즉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는 몽산법어 <시총상인(示聰上人)> 장의 내용과 거의 같다. 다만 다른 점은 몽산법어에서는 문학적 표현을 빌려서 말하고 있는 반면, 선문정로에서는 이것을 실제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몽산법어의 문학적 표현을 놓고 실제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 정도로 즉 오매일여가 되도록 일심으로 참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것인지? 그것은 각자의 의견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필자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몽산 화상은 이와 같은 문학적 표현을 통해서(빌려서) 화두참구 상태를 우회적, 상징적으로 형용한 것이다. 즉 오매불망 일심으로 참구하면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 실제적인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문학적 표현으로 형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나옹어록과 태고어록
나옹어록. 공부(화두참구)가 지극하여 움직일 때나 가만히 앉아 있을 때나 단절됨이 없고 또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똑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망실(亡失)되지 않는다. 마치 개가 기름이 끓는 솥을 보고 입으로 핥으려고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이때에는 필경 어떻게 할 것인가?
태고집. 만약 (화두참구를) 사흘 동안 끊어짐 없이 여법하게 하여,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도 한결같고(動靜一如), 말하거나 침묵할 때도 한결같아서(語?一如), 화두가 항상 내 앞에 나타나되, 마치 급히 흐르는 여울에 비친 달빛과 같아서 손가락을 대도 흩어지지 않으며 세게 쳐도 흩어지지 아니하여 자나 깨나 한결같게 되면 곧 대오하게 될 것이다.
시소선인(示紹禪人)장. 의심과 화두가 하나가 되어 동정과 어묵에 항상 무 자를 들면 점점 오매일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엔 (다른 생각은 없고) 오직 화두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생각이 없고 마음이 끊어진 곳에까지 이르게 되면 금까마귀가 한밤중에 하늘을 뚫고 날 것이다. 그때에도 희비심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본색종사를 찾아가서 영원히 의심을 끊어라.
고려 말의 선승 나옹 화상(1320~1376)과 태고보우(1301~1382)는 몽산 화상(1231~1308)을 대단히 존경하여 스승처럼 여겼다. 그런 까닭인지 두 선승 역시 몽산법어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쓰고 있다. 이 역시 문학적 표현에 가까운데 필자는 두 선승의 표현 역시 일심으로 참구하라는 의미이지, 실제적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 태고는 소선인에게 보인 법어에서 깨닫는 순간을 형용하여 “금까마귀(해를 가리킴)가 한밤중에 하늘을 뚫고 날아올라 갈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만일 이것을 실제적 의미로 해석하여 ‘깨닫는 순간에는 정말 금까마귀가 한밤중에 하늘을 뚫고 날아올라 가게 된다.’라고 해석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금까마귀는 해를 가리킨다. 이것은 번쩍하고 깨닫는 순간을 이와 같이 형용한 것이다. 마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형용한 것이다. 실제적 상황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말 일평생 두고두고 폭소할 일이다.
또 몽산 화상과 나옹, 태고 화상의 표현은 성철 스님처럼 단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만일 나옹, 태고 화상도 성철 스님의 말씀과 같이 실제 밤에 숙면 속에서도 화두를 놓거나 망각하지 않아야만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매일여를 실제적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이라면 이분들의 사상적 근간을 의심케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거듭 말하거니와 그렇게 보지 않는다.
4) 대혜종고와 향시랑(向侍郞), 대혜종고와 원오(圜悟)의 대화
대혜종고와 향시랑의 서신 문답은 대단히 중요하다. 본고에서 그리고 선문정로에서 인용하고 있는 오매일여에 관한 여러 가지 전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이야기되고 있는 오매일여란 조사선에서 오매일여가 아니라 간화선에서 오매일여이고 그것도 ‘성철식 오매일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화선(화두선)을 대성 체계화 시킨 대혜 선사의 견해가 오매일여의 실제적 사실 여부를 판가름하는 글이라고 본다.
또 대혜종고의 이 글 속에는 오매일여의 문제를 가지고 스승 원오와 나눈 대화도 포함되어 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하다. 대혜종고와 원오극근 이 두 선승은 오매일여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대혜종고의 서간집으로 강원의 교재인 서장(書狀) 향시랑장의 내용이다. 좀 긴 글이지만 매우 중요하므로 가능한 한 모두 인용하도록 하겠다.
향시랑이라는 사람은 당시(송대) 호부(戶部)에서 시랑 벼슬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서 이름은 향백공(向伯恭)이다. 그는 사대부로서 대혜를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하다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悟與未悟), 꿈과 깸이 하나(夢與覺一)인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만법은 모두 하나(萬法一如)’라고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오여미오(悟與未悟)’ ‘몽여교일(夢與覺一)’도 하나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입장에서 질문한 듯하다. ‘몽여교일’은 ‘몽교일여(夢覺一如)’와 동의어로서 오매일여를 뜻한다.
향시랑 백공에 대한 답서(편의상 1, 2, 3단으로 나누어 표시함)
1단. 편지에 말씀하신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悟與未悟), 꿈과 깸이 하나입니까(夢與覺一)?"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만일 반연(攀緣, 망상 분별)하는 마음으로 법(法)을 듣는다면 이 법도 반연(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능엄경 2권)"라고 하셨고, 그리고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無夢)."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없다’는 것은 ‘있다, 없다’의 ‘없다’가 아닙니다. 꿈과 꿈 아님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께서 황금북(金鼓)을 꿈꾸고 고종(高宗)이 꿈에 부열(傅說)을 만나고 공자(孔子)가 꿈에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은 것도 ‘꿈이다, 꿈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사를 돌이켜 보면 모두가 다 꿈속의 일과 같다(猶如夢中事)."라는 경전의 말씀도 있습니다. 오직 꿈은 모두 망상(妄想)인데도 중생은 전도(顚倒)된 생각으로 매일 대하는 눈앞의 현실을 실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꿈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허망한 분별심을 일으켜서 망상심으로 생각을 매어서(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꿈을 참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꿈속에서 꿈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전도 중에서도 더욱 전도된 것임을 전혀 모르는 소치입니다. (......) 그러므로 꿈도 곧 진실이고 진실도 곧 꿈이어서 어느 하나를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인에게는 꿈이 없다(至人無夢)는 뜻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2단. 편지 속의 질문은 바로 내가 36세 때의 의문점이었습니다. 편지를 읽으니 나도 모르게 가려운 곳을 긁는 느낌이었습니다. 나 역시 일찍이 이 문제를 가지고 스승 원오 스님에게 여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오 선사께서는 다만 손을 저으며 말씀하시기를 “그만두게/ 그만두게/ 망상을 쉬게/ 망상을 쉬게(住住, 休妄想, 休妄想).”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또 “제가 잠자지 않았을 때에는 부처님께서 찬양하신 것(선행)은 잘 실행하고 부처님께서 꾸짖은 것은 절대로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여러 큰스님의 보살핌과 또 스스로 공부하여 조금 얻은 것을 깨어 있을 때에는 전부 마음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침상에 누워 잠이 들려고 할 때에는 이미 저 자신을 마음대로 하지(主宰, 컨트롤) 못하고, 꿈에 황금이나 보물을 얻으면 한없이 기뻐했고, 꿈에 사람이 칼이나 몽둥이를 들고 나를 해치려 하거나 여러 가지 나쁜 경계(일)를 만나면 두려워 겁에 벌벌 떨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이 몸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단지 잠 속에서는 저 자신을 주재(컨트롤)할 수가 없으니,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흩어져서(죽을 때) 갖가지 고통(죽음의 고통)이 치성하면 어떻게 휘둘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면 마음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들으시고 원오 선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네가 말하는 허다한 분별 망상이 다 없어질 때가 되면 그대는 저절로 자나 깨나 항상 하나가 되는 경지(寤寐恒一處)에 도달하게 될 것이네.”
처음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늘 생각하기를 '날마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 깨어 있을 때(寤)와 잠들어 있을 때(寐)가 분명히 둘로 나누어지고 있는데(하나가 되지 못함), 어떻게 감히 선(禪)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부처님께서 (능엄경에서) 말씀하신 ‘오매항일’이 망어(妄語)가 아니라면 나의 이 병은 제거할 필요도 없겠지만, 진실로 부처님께서 사람을 속이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라고.
그런데 훗날 원오 선사께서 제시하신 “제불의 출신처, 훈풍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라는 말에서 문득 가슴에 걸려 있던 것이 내려갔습니다(의심 해소 즉 깨달음). 그리하여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진실한 말이며, 그대로의 말이며, 망어가 아니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 말이며, 참된 대자비의 말씀이었습니다. 몸을 가루로 만들고 목숨을 버리더라도 은혜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가슴 속의 응어리가 풀리고 나서야 비로소 밤에 꿈을 꿀 때가 바로 깨어 있는 때이며, 깨어 있는 때가 바로 꿈을 꾸는 때라는 것을 알았으며,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늘 하나(寤寐恒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도리는 꼭 집어내어 남에게 보여 줄 수도 없고,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습니다. 꿈속의 경계(일)는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아닙니다.
3단. 당신이 편지를 통하여 나에게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悟與未悟)?” 하고 질문한 것을 대하고 나도 모르게 진실을 그대로 털어놓았습니다.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니 글자 하나하나가 지극히 정성스러워서, 선에 대하여 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따지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옛날 의문점을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원컨대 거사(居士)께서는 방거사(龐居士)가 말씀하신 “모든 있는 것을 비워 버릴지언정, 간절히 없는 것을 진실로 여기지 마라.”라는 말을 참구해 보십시오. 먼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그날그날의 일을 분명히 꿈이라고 이해한 뒤에, 다시 꿈속의 일을 현실의 일로 옮겨서 대비시켜 본다면, 부처님이 꿈에 금고를 꿈꾼 것과 고종이 꿈에 부열을 얻은 것과 공자(孔子)가 꿈에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은 것이 결코 꿈이 아닐 것입니다.
대혜 스님이 향시랑에게 답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1단에서는 깨침(悟)과 깨치지 못함(未悟), 그리고 꿈과 깸(꿈 아님=현실)이 모두 다 같다는 것이다. 부질없이 오(悟)와 미오(未悟), 꿈과 현실을 분별하거나 둘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낮 동안의 일(깸)도 꿈이지만 밤의 꿈도 모두 다 꿈이라는 것이다. 꿈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非實在) 현실의 현상도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므로(非實在)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두 다 꿈인데 중생은 전도된 생각으로 실제로 여겨서 허망된 분별심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극한 사람은 꿈이 없다(至人無夢)’라는 말도 유와 무의 상대적인 ‘무’, 대립된 ‘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로 나누어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꿈 이야기의 원형은 ??장자??이다. ??장자?? <제물론(모든 논의를 가지런히 한다.)>에서는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는데 자기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이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즉 누가 누구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객미분(主客未分)과 물아양망(物我兩忘)을 말하고 있다. 주객을 나눌 수 없으므로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고, 물아를 모두 잊으라는 것이다.
2단에서는 대혜 자신도 36세 때에 오매일여의 문제를 가지고 스승 원오 선사에게 물었더니(대혜도 36세 이전에는 오매일여를 실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물었던 것이다.), 원오 선사가 두 손을 내저으며 “그만하게/ 그만하게/ 망상을 쉬게/ 망상을 쉬게/(住住, 休妄想, 休妄想).”라고만 대답하므로, 다시 자신이 겪은 꿈속의 일들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원오 선사가 “그대가 말하고 있는 허다한 망상이 모두 다 단절되면 그때는 저절로 오와 매를 분별하지 않는 오매항일에 이르게 될 것이네.”라고 하여 매우 답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 자신(대혜)이 과거에 스승 원오 선사에게 ‘제불출신처’에 대하여 묻자 “훈풍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라고 했는데 그 말에서 문득 깨달았다는 것이다. 깨닫고 보니 비로소 오매항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은 오매일여를 분별하지 말고 일심으로 참구하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대혜의 스승이자 벽암록의 작자인 원오의 관점은 오매일여에 대하여 부질없이 망상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화두참구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분별 망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갖가지 망상이 다 사라져서 깨닫게 되면 그때엔 저절로 오매일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단은 대혜 스님이 질문자 향시랑에게 방거사의 법어 즉 “오로지 있는 것을 비워 버릴지언정 없는 것을 실재(實在)로 여기지 마라(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라는 법어를 참구해 보라고 제시한 다음 “그날그날의 일을 꿈이라고 인식한 뒤에, 다시 꿈속의 일을 현실과 대비시켜 이해한다면 몽교일여(오매일여)에 대한 궁금증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대혜종고는 “오로지 있는 것을 비워 버릴지언정 없는 것을 실재(實在)로 여기지 마라.”라고 하여 오매일여를 실제로 보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도 모두 꿈이지만 꿈도 꿈이며, 더 나아가서는 꿈과 현실, 현실과 꿈을 초월하여 하나로 보라는 것이다. 즉 그 어떤 분별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혜 스님의 편지 내용을 전체적으로 다시 간략히 요약해 보면, 깨어 있을 때에는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통제했는데(주재했음), 잠이 들거나 꿈속에서는 마음대로 통제할 수가 없어서(대혜도 처음에는 화두참구가 실제 오매항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음), 이 문제를 가지고 스승 원오에게 물었더니 “다 망상이므로 그 망상이 다 끊어질 때가 되면 저절로 깨어 있을 때와 잘 때가 늘 하나인 곳에 도달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후 원오(?悟) 선사가 제시한 화두에서 깨닫고 나서 비로소 오매일여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것인데, ‘무슨 뜻인지 알았다.’라는 것은 ‘오매일여에 대하여 분별, 망상하지 말고 일심으로 참구하면 깨닫게 된다.’라는 뜻이다.
원오가 대혜에게 한 말은 물론이고 대혜 선사가 향시랑에게 보낸 편지 역시 부질없이 ‘오여미오(悟與未悟)’, 그리고 ‘오매일여’나 ‘오매항일’에 대하여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매일여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다. 방거사의 법어를 인용하고 있는 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직 있는 것을 비우려고 할지언정 없는 것을 실(實)로 삼지 마라."라는 것이다.
오매일여를 실제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또 꿈과 현실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도 말고 모두 하나로 보라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본질적으로 번뇌가 곧 보리요, 일체중생이 다 부처이며, 명명백초두 명명조사의인데, 오(悟)와 미오(未悟), 꿈과 현실을 분별하는 것은 전도망상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간화선을 대성 체계화시킨 대혜종고와 그의 스승 원오극근의 말에서도 오늘날 선문정로의 해석과 같이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오매일여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분별 망상으로 파악하여 크게 경계하고 있다.
5) 능엄경에서 말하는 ‘오매일여’
‘오매일여’ ‘오매항일’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경전은 능엄경이다. 능엄경 제10권 상음변마장에서는 오매항일(오매일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난아, 선남자가 삼마지(삼매)를 닦아서 (그 결과) 상음(想陰, 생각=분별/망상/번뇌)이 다 없어지면 그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없어져서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항상 한결같게 된다(오매항일). 또 깨달음은 밝고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아서, 다시는 거칠고 무거운 전진영사(前塵影事, 번뇌)가 없다. 세간의 모든 산하대지(山河大地)를 보면 마치 밝은 거울에 비춘 것과 같아서, 다가와도 묻지 않고 지나가도 흔적이 없어서 텅 빈 채 조응(照應)한다. 오래된 습기(習氣)는 전혀 없고 오직 하나의 맑고 참됨만 있을 뿐이다. 번뇌의 생멸근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능엄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매항일’ ‘오매일여’란 생각이 다 없어지면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을 자도 꿈이 없다고 하여 잠을 잘 적에 꿈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낮에는 번뇌가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가 오매항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밤에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낮 동안에 생각(번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밤에 꿈이 없어야만 비로소 상음(생각)이 다 소멸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화두참구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낮에는 생각이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 즉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여 맑게 갠 하늘과 같은 상태를 오매항일, 오매일여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계환(戒環)의 주해에도 “번뇌 망상은 낮에는 잡념(생각)으로 발전하고 밤에는 꿈으로 발전하여 본성품을 혼란케 하여 순일할 수 없고, 각명(覺明)을 요동시켜서 고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음이 다한 자는 몽상(夢想)이 소멸하고 오매항일해서 각명이 허정(虛靜)함이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다.”라고 하여 번뇌 망상이 제거되면 낮에는 생각이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화두를 참구하여 실제 오매일여 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6) 현사어록의 내용
다음은 현사사비어록(玄沙師備語錄)의 내용인데 사실 이 문장은 오매일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글이다. 이 문장은 요즘 일부 선승들이 소소영영한 영대지성이 있다는 말로 고승인 양 행세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기(詐欺)라는 것이다. 소소영영한 주재자가 있다면 그것은 분별 망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문정로?? 오매일여 장에서는 숙면 속에서도 잠들지 않는 소소영영한 주재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이 글은 선문정로 오매일여 장의 첫 번째 전거로 인용하여 오매일여를 실제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므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문득 똑같이 말하기를, 소소영영한 영대지성(심의식)이 있어서 (그것이) 능히 보고 들으며 오온신(우리의 육체) 속에서 마음대로 주재(컨트롤)한다고 말하나니, 이런 말로 스스로 선지식인 양 자처한다면 이것은 크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대가 만일 소소영영함을 그대의 진실(본성)을 삼는다면, 어째서 잠잘 때에는 소소영영함이 작용하지 않는가?(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가?) 만약 밤에 잠잘 때에 소소영영함이 없다면 어째서 낮에는 소소영영함이 있는가?(만일 이 소소영영함을 그대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도리어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번뇌 망념이 기멸(생사)하는 근본이요, 망상을 일으키는 기운(氣運)이다.
그 이유를 알고 싶은가?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너의 소소영영은 다만 전진(前塵)의 6경(境)인 색성향미촉법에 의하여 일어나는 분별 의식일 뿐이다. 말해 보라. 이것이 바로 (그대가 말하는) 소소영영함인가? 만약 전진(前塵)의 6경인 색성향미촉법이 없다면 (그대의 소소영영도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대의 소소영영은 거북이 털이나 토끼뿔과 같은 것이다(허황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현사어록의 내용은 사실 오매일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글이다. ??현사어록??의 내용은“소소영영한 영대지성(심의식)이 있어서 (그것이) 능히 보고 들으며 오온신(우리의 육체) 속에서 마음대로 주재(컨트롤)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말로 큰스님인 양 행세를 한다면 이것은 큰 사기꾼(大?人)이라는 것이다. 소소영영은 한마디로 육근이 육진(경)을 만날 때 생기는 분별/지각(知覺)에 불과한 것이므로 소소영영함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진실함 즉 본성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소소영영함을 진실/본성으로 삼는다면 어째서 잠을 자면 소소영영한 주재자가 없고 낮에는 주재자 있어서 육신을 컨트롤하는가? 소소영영이 본성이라면 낮처럼 밤에 잠잘 때에도 소소영영이 작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낮에 육근이 육경을 만나서 작동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므로 그런 허황된 말을 하여 선지식인 양 행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선사는 소소영영함 자체를 지각심과 분별 망상으로 보고 있다. 숙면 속에서도 잠들지 않는 주재자 즉 소소영영함이 있어야 한다면 사실 이것은 아트만설과 유아론에 가깝다. 그런데 선문정로에서는 뜻밖에도 현사의 글을 인용하고 나서 “여하(如何)히 대오하고 지견이 고명한 것 같아도 실지경계에 있어서 숙면 시에 여전히 암흑하면 이는 망식의 변동(變動)이요 실오(實悟)는 아니다. 그러니 수도자는 반드시 오매일여의 실경(實境)을 투과하여야 정오(正悟)케 된다(??선문정로??, 109쪽).”라고 하여, 오히려 소소영영함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즉 현사가 혹평하는 분별/지각을 오매일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 선에서는 소소영영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그놈이 무엇인지 찾아보라."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문제는 이미 육조혜능의 제자 남양혜충(?~775)도 ??전등록?? 28권 <혜충>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소소영영한 영대지성이나 견문각지하는 주재자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불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성(神性)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문정로에서는 이 대목에 부분적으로 몇 자가 누락되어 있으며, 특히 매우 중요한 ‘什 有昭昭時 汝還會’를 누락시킨 채 해석하고 있다(선문정로, 108쪽 3행). 11자(字)를 빼고 해석하면 그 부분만은 긍정적인 문장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 문장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뜻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11자를 누락시킨 채 해석한다는 것은 그 논리 자체가 부실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필자가 확인한 자료에는 모두 11자가 들어가 있다. 이것은 고의가 아니면 실수인데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서 11자를 누락하는 실수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또 현사사비는 벽암록 4칙 평창(評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마음의 상태가 흡사 가을 연못의 달그림자(秋潭月影, 소소한 상태) 같고 고요한 밤의 종소리(靈靈한 상태) 같아서 세게 쳐도 부서지지 않고 물결에 부딪혀도 흩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생사의 언덕에 있는 상태일 뿐이다(玄沙道, 直似秋潭月影, 靜夜鐘聲, 隨?擊以無虧, 觸波瀾而不散, 猶是生死岸頭事).”라고 하여, 여기서도 현사는 소소영영 자체를 ‘생사안두사(猶是生死岸頭事)’라고 혹평하고 있다. 현사어록 곳곳에서 그는 식신(識神)이나 주재자, 소소영영을 진실함(본성)으로 보지 않고 모두 허상으로 보고 있다.
3. 끝맺는 말
이상과 같이 ‘오매일여’ ‘오매항일’에 대하여 근래 간행된 선문정로를 비롯하여 몽산법어, 나옹어록, 태고어록, 그리고 대혜종고의 서장과 대혜와 그의 스승 원오와의 대화, 능엄경 10권 상음장과 계환의 능엄경 주해, 현사어록 등을 살펴보았다.
1) 오매일여의 정의
그런데 간화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대혜종고의 서장과 능엄경, 계환의 능엄경주해 그리고 현사어록에서는 화두를 참구하여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선문정로처럼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실제 숙면 속에서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또는 ‘망각, 상실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식으로 정의하고 있는 곳은 없다. 오매일여가 되어야만 깨닫게 되는 것, 또는 그렇게 되어야만 깨달은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곳은 없다. 몽산법어, 나옹어록, 태고어록에서도 선문정로처럼 단정적으로 표현한 곳은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오매일여에 대한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은 뭐니뭐니해도 몽산 화상의 법어이다. 몽산법어에서는 “동정에 일여(動靜一如)하고, 자나(寤) 깨나(寐) 성성(惺惺)하면, 즉 오매일여(寤寐一如)하면 화두가 앞에 나타나게(話頭現前) 된다.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같고 여울물 속에서도 활발발(活潑潑, 살아 있음)하여, 손가락을 대도 흩어지지 않고 세게 쳐도 흩어지지 아니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도 자나 깨나 성성하게 참구하면 화두가 눈앞에 있는 듯해진다는 것이지, 숙면 속에서도 실제 화두를 놓지 말고 참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에 ‘삼삼하다’는 말이 있는데 몽산이나 태고가 말한 ‘화두현전(話頭現前)’은 바로 그 뜻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문학적, 신비적인 표현은 후인들로 하여금 실제적 상황으로 혼동, 착각할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후 몽산을 스승으로 생각했던 나옹, 태고 화상도 몽산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선문정로에서는 이것을 실제적 사실로 받아들여서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또 선문정로에서는 여기서 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실제 화두참구가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 상태가 되어야만 깨달은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돈오견성(완전히 깨달은 것)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과잉 해석하고 있다.
특히 성철 스님은 대혜 서장 향시랑장과 능엄경, 현사어록의 내용을 정반대로 해석하여 중요한 전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오매일여를 사실화, 정당화하기 위한 억지 해석이다. 즉 오매일여의 뜻을 낮에는 물론이고 밤에 깊은 숙면 속에서도 화두를 놓지 않아야 한다고 정해 놓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몽산법어 등의 표현을 적당히 감안하지 않은 채 너무 사실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본다. 무슨 말이든 언어 속에는 일정 부분, 과장이 들어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한자 속에는 과장이 많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거듭 말하거니와 오매일여의 정의는 간화선을 대성?체계화시킨 대혜종고와 그의 스승 원오극근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분별심을 갖지 말고 일심으로 참구하라는 뜻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웅그리고 앉아서 집중하고 있듯이, 닭이 정성스럽게 알을 품고 있듯이 분별심을 갖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구하라는 뜻이다.
2) 오매일여는 과연 가능한가?
물론 오매일여나 오매항일을 화두참구 방법에 적용할 수는 있다고 본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과연 숙면 속에서도 실제 화두를 놓치지 않고 참구해야 하는가?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를 망각하지 않고 참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화두참구의 최종적인 단계이고, 간화선을 대성?체계화시킨 대혜 선사의 생각이며, 간화선 수행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가? 깨달음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우선 화두를 참구하여 실제 오매일여의 상태를 유지하자면 잠을 자지 않거나 선잠을 자야 가능한 것이다. 의식이 숙면 속에서도 계속 이어져야 하고 주재자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무아를 핵심적 가르침으로 삼고 있는 불교에서 자칫 유아론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또 숙면 속에서도 깨어 있을 때와 다름없이 화두를 놓치지 않고 참구해야 한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실현 불가능한 것을 가지고 수행이나 깨달음의 척도로 삼는다면,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오히려 오매일여의 망상병에 걸려서 일생을 허비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우리는 낮에 있었던 일들이 그날 꿈속에서 일부 재현되는 경우는 있다. 낮의 사건이 매우 심각했을 경우, 또는 어떤 일로 고민이 깊고 깊었을 때 그 일들이 꿈속에서 이어지는 경우인데, 이것은 낮에 있었던 일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일부가 꿈속에서 재현된 것뿐이다. 누구든 한 문제를 자나 깨나 골몰하게 생각하면 그런 현상은 다 나타난다. 화두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낮에 깨어 있을 때처럼 화두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장된 해석이다.
화두참구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직 성철 스님의 견해이다. 역대 선승 가운데 그 누구도 오매일여를 이런 식으로 단정적으로 표현한 선승은 성철스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오늘날 말하고 있는 ‘성철 스님식 오매일여’는 화두참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을뿐더러 깨달음의 잣대로도 삼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지능지수가 보통인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설법하셨다. 설사 화두를 참구하여 실제적인 오매일여(숙면 상태에서도 화두 참구)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의 정의와는 다른 도교적 신비주의이며 특수한 한두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중생을 위한 보편적인 지도법이나 가르침이 아니다. 실현 불가능한 것을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 제시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애당초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하화중생을 목표로 하고 있는 대승의 보살심인가?
3) 오매일여와 깨달음의 정의
깨달음이란 그 정의가 번뇌 망상을 제거하여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무상, 고(苦), 무아(無我)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탐(貪), 진(瞋), 치(痴)를 제거하여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정의는 필자의 정의가 아니고 아함경의 정의이고 많은 불교개론서의 정의이다. 초기불교의 개념인 열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선에서는 ‘열반’이라는 인식에서 머물지 않고 현실의 삶 속에서 무소유, 무집착의 삶을 사는데 더 비중을 두었다고 생각된다.
화두참구 역시 그 목적이 번뇌와 망상, 집착에서 벗어나 무위진인(無位眞人), 수처작주(隨處作主)가 되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화두라는 무기를 가지고 번뇌 망상을 퇴치하자는 것이다. 번뇌 망상이 퇴치되면 지혜가 자라나서 요익중생(饒益衆生), 하화중생 할 수 있다. 양생술이나 장생술, 신선도, 단전호흡, 기공(氣功) 등 도교적인 육체적 정신적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깨달음의 정의는 번뇌 망상을 제거하여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정의가 이러함에도 어째서 “화두참구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깨달은 상태”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깨달음의 정의와는 거리가 멀고 또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것은 깨달음의 정의, 선의 정의는 저 구석에 내팽개치고 육체적 정신적 신비주의, 도교적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간화선에서 한참 빗나가 있다. 이것은 성철선의 기준일 뿐 간화선의 수행과 깨달음의 기준이나 척도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 선불교는 이 모두를 선과 혼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만일 오매일여를 일심으로 참구해야 한다는 말로 보지 않고 실제적인 의미로 본다면, 즉 숙면 속에서도 화두를 놓지 말고 참구해야만 깨닫게 되는 것이고 돈오견성한 것이라고 한다면, 앞의 ??태고어록?? ?시소선인(示紹禪人)?장에 “의심과 화두가 하나가 되어 동정과 어묵에 항상 무자를 들면 점점 오매일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엔 (다른 생각은 없고) 오직 화두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생각이 없고 마음이 끊어진 곳에까지 이르게 되면 금까마귀가 한밤중에 하늘을 뚫고 날 것이다(疑與話頭成一片, 動靜語默常提無,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 疑到情忘心絶處, 金烏夜半徹天飛).”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목도 실제로 깨닫게 될 때(이것은 눈이 번쩍하고 깨닫는 순간을 형용한 것임)는 한밤중에 금까마귀가 하늘을 뚫고 날아 올라간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는가? 깨달을 때엔 정말로 한밤에 금까마귀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실제적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인가? 선어의 낙처(落處)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4) 언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
언어란 표면적인 뜻보다는 실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예컨대 우리말에 이런 표현이 있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
이 말은 워낙 그 음식이 맛있어서 ‘둘이서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라는 뜻이다. 맛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과장법인데, 이 말을 실제적 상황으로 판단하여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야만 최고의 요리’라고 해석한다면 과연 올바른 해석일까? 과연 이 세상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있을까? 그런 요리사가 있을까?
또 요즘 젊은 층에서 너무 좋으면 ‘뿅 갔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너무 좋다’라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것을 '실제로 정신이 뿅 나갔다’라는 등의 뜻으로 해석한다면 뒤로 넘어져서 혼절했다는 것인데, 정말 올바른 안목에서 나온 해석일까?
‘오매일여’ ‘오매항일’은 사실 ‘오매불이(寤寐不二)’ ‘인경불이(人境不二)’와 같은 말이고, ‘만법일여(萬法一如)’ ‘물아일여(物我一如)’와 같은 말이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오로지’ 즉 ‘하나’ ‘한결같음’을 뜻한다. 한결같지 않음은 이미 분별심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화두참구에 적용한다면 분별심을 갖지 말고 일심으로 화두를 참구하라는 뜻이다.
화두에 대한 생각이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상태, 화두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오매일여이다. 군에 간 아들을 생각하듯, 시집간 딸을 생각하듯,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쥐굴 옆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앉아 있듯이, 닭이 스무하루 동안 정성 들여 알을 품고 있듯이, 오매불망 일심으로 화두를 참구하면 철옹성 같은 화두의 문도 결국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매일여의 어원은 시경(詩經) 관저장의 ‘요조숙녀(窈窕淑女), 오매구지(寤寐求之), 구지부득(求之不得) 오매사복(寤寐思服)’이다. ‘요조숙녀를 자나 깨나 찾는다.’라는 말로서 훌륭한 아내를 구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는 시(詩)이다. 오매일여, 오매불망이라는 말도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윤창화
1972년 해인사 강원 13회 졸업.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졸업(1999). 논문으로는 해방 후 역경(譯經)의 성격과 의의(대각사상 5집, 2002),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한암사상 1집, 2006). 한암선사의 서간문 고찰(한암사상 2집, 2007)이 있다. 지금은 《현대불교신문》에 오늘의 선어를 연재하고 있다. 민족사 대표.
[블로그 수졸재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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