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불교신문 기획연재>

희명화 2011. 11. 1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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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청정승가 구현 방안 성숙시키다
⑮ 대승사 묘적암
데스크승인 2011.10.17  18:01:35 이진두 | 논설위원  

   
사불산 묘적암. 성철스님은 1945년 동안거를 이곳에서 지냈다. 차에서 내려 돌계단을 스무 개 남짓 걸어 올라가면 일주문이 있다. 현판은 불이문. 작지만 고풍스런 품격의 일주문을 지나면 법당 한 채, 요사채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성철스님은 1945년 동안거를 대승사 암자인 묘적암(妙寂庵)에서 지냈다. 이 해는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8.15광복을 맞은 해다. 스님은 큰절 대승사에서 산내 암자인 묘적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서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한 구상을 깊게 했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점령한 후 불교계를 그릇치고 비뚤어지게 했다. 독신출가 수행이 근본인 한국불교를 자기네 마음대로 승려의 결혼을 강제하고 절간에서 처자식을 기르는 등으로 수행공간을 훼손시켰으며 육식을 하는 등 막행막식의 풍토를 조성했다.

일제치하에서 왜색불교의 병폐를 너무나 절감한 스님은 광복 후 우리불교의 청정승가 수행을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 방안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성숙시켜나갔다. 스님의 이 구상은 1947년 봉암사결사에서 하나하나 드러나게 된다.

법당 한 채·요사채 한 채 ‘침묵이 곧 우레(一如雷)’

‘가장 완벽하고 높은 경지’ 실현하는 도량(妙寂庵)

고려말 나옹스님 출가사찰 백련암 입구와 너무나 닮아…

묘적암은 창건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라 말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 나옹(懶翁)스님이 출가한 절로 유명하다. 나옹스님(1320~1376)은 경북 영해(寧海, 현재 경북 영덕군 창수면) 출신이다.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이며 당호는 강월헌(江月軒). 불명은 혜근(惠勤)이며 속성은 아(牙)씨다.

나옹스님은 20세 때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어른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을 품고 공덕산(功德山, 지금의 사불산) 묘적암으로 와 요연(了然)화상에게서 스님이 되었다.

나옹스님이 처음 요연스님을 찾아 스님이 되기를 청하였을 때 요연스님이 물었다.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이냐?” 나옹스님은 “말하고 듣는 것이 왔거니와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 하니 요연스님이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께 가서 물어라”고 했다. 뒷날 나옹스님이 도를 깨닫고 다시 이 절로 돌아와서 회목 42그루를 심었으며 나옹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절에 찾아왔다.

   
묘적암 법당 외관.
나옹스님으로 인해 이 묘적암은 조선후기까지 불교의 한 성지(聖地)로 부각되었다. 1668년 성일(性日)스님이 중건하였고 1900년 취원(就圓)스님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묘적암. 큰절에서 약 1.5㎞ 거리다. 가파른 산길인데 차 2대가 마주 스쳐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길이다. 오르막 내리막 굴곡이 심하여 길이 났다고 해도 차를 타고 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큰절 대승사 총무국장 현광(玄光)스님이 자기 차로 앞장서서 암자에 이르는 길을 안내했다.

묘적암 입구에 서니 꼭 해인사 백련암 입구와 형상이 많이 닮아 이름난 수행처는 이런가 싶었다. 차에서 내려 돌계단을 스무 개 남짓 걸어 올라가니 묘적암 일주문이 있었다. 그 일주문, 불이문이라는 현판이었다.

또한 백련암 일주문과 너무 닮았다. 옛 산중 깊은 곳 암자 일주문은 이런 형태로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고풍스런 품격의 일주문을 지나니 작은 마당이었다. 법당 한 채, 요사채 한 채. 중수이후 손을 보지 않은 듯 고색창연했다.

   
 
이 작은 공간, 작은 법당 그보다 더 작은 요사채가 있는 이 암자는 여러 명이 공부하기엔 힘든 그런 공간이었다. 도회지의 웬만한 집도 이보다는 크지 싶었다. 절을 지키는 스님도 출타하고 없었다. 빈집 같았다.

마침 법당 안에서 젊은 부부가 나왔다. 절을 얼마나 했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부부가 절을 나간 후 법당에 참배했다. 법당 옆에 조그만 방이 있었다. 마치 선방의 지대방 같은 곳이었다. 그곳이 이곳 스님의 거처인 듯 했다.

요사채 벽에 있는 일묵여뢰(一如雷, 침묵이 곧 우레)라는 현판이 눈에 띄었다. 진주의 명필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선생의 필체다. ‘정사(丁巳) 하(夏)’라고 쓴 것을 보아 그분이 1977년 여름에 이 문구를 쓴 것으로 알 수 있다. ‘침묵이 우레와 같다’는 이 말이야말로 이 암자 이름인 ‘묘적’과 정말로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해방 후 왜색불교병폐 절감…나라 앞날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깊고 무거운 고뇌 속에서 보냈으리라 …

이곳에서 정진하고 있는 영진스님. 그는 출가한지 40년 된 구참이라 한다. 영진스님은 지난 4월말 불교신문 인터뷰에서 묘적암을 이렇게 말했다.

“불교에서 묘(妙)라는 글자는 ‘가장 뛰어나다, 깊다,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불교에서 대승(大乘)의 지극(至極)을 이르는 말, <법화경>에서도 묘(妙)는 가장 완벽한 글자이지요. 또 적(寂)은 적멸, 열반과 같이 형상적으로 보면 ‘주변이 고요하다’는 뜻이지만 ‘가장 높은 경지’를 일컫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암자는 ‘묘와 적을 실현하는 도량’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묘적암, 언제나 이렇듯 조용하고 적적할까. 여기 사는 스님은 이 깊고 고요한 절에서 어찌 지낼까. 끼니는 어찌 꾸려나갈까를 생각하는 것은 속인의 어리석은 마음일까.

출가수행자는 이런 묘적의 공간에서도 자신의 길을 닦아나가고 시장바닥 같은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 동과 정(動靜)에서 변치 않는 항상심을 지니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일체경계에 무심, 일체(一切)에 무심(無心)이 수행자가 추구하는 곳이라는 말일까.

성철스님이 묘적암에서 지낼 때 생식(生食)을 했음도 짐작할만하다. 출가수행자나 재가불자나 가릴 것 없이 끼니를 때우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다. 절에서는 그래서 각자 소임이 있다. 밥 짓는 공양주, 찬 만드는 채공 등이 후원 공양간에서 수행자의 공양을 맡는다.

   
 
그러기에 선방 수좌나 강원 학인을 비롯한 스님들은 각자 자기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 공부하다가 때가 되면 공양하면 된다.

묘적암처럼 공양간을 차리기도 힘든 공간에서는 먹는 일이 여간 아니다. 어쩌면 성철스님도 그래서 생식했나보다. 먹는 일에 끄달리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음이 생식의 장점이다. 그러나 생식이라 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느 스님, 누구라고 말하면 웬만한 불자는 다 아는 스님이다. 그 스님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철 큰스님이 생식하신다고 해서 나도 해 보았어요. 그런데 생쌀을 그냥 씹어 먹으려니까 이도 아프고 잘 씹히지도 않고 해서 큰스님께 물었어요. ‘스님, 생식은 어찌 합니까’ 스님은 ‘그래, 생식한다꼬 생쌀 씹어 묵었나. 허허, 그라모 안되지. 쌀을 물에 불려놓았다가 꼭꼭 씹어 묵어야지’ 그러셨어요. 생식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광복을 맞은 우리나라. 이른바 해방공간에서 성철스님은 묘적암, 그 고요하고 깊은 산중암자에서 무슨 구상을 그리 깊게 했을까. 한국불교의 앞날, 나아가 해방된 나라의 앞날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깊고 무겁게 보냈으리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 시대의 격변기에서 진리를 체득한 선지식으로서 스님의 구상은 그 이후로 크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고행(苦行)

병(病) 가운데 제일 큰 병은 게으름 병이다. 모든 죄악과 타락과 실패는 게으름에서 온다. 게으름은 편하려는 것을 의미하니 그것은 죄악의 근본이다. 결국은 없어지고 마는 이 살덩어리 하나 편하게 해 주려고 온갖 죄악을 다 짓는 것이다.

노력 없는 성공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대성공자는 대노력가가 아님이 없다. 그리고 이 육체를 이겨내는 그 정도만큼 성공이 커지는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말했다. “나의 발명은 모두 노력에 있다. 나는 날마다 20시간 노력하여 연구했다. 그렇게 30년간 계속 하였으나 한 번도 괴로운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의 정법이 두타제일(頭陀第一)인 가섭존자에게로 오지 않았는가. 총림을 창설해서 만고에 규범을 세운 백장(百丈)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하지 않았는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편히만 지내려는 생각, 이러한 썩은 생각으로서는 절대로 대도(大道)는 성취하지 못한다. 땀 흘리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남의 밥 먹고 내 일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서는 만사불성(萬事不成)이다.

예부터 말하기를 차라리 뜨거운 쇠로 몸을 감을지언정 신심 있는 신도의 의복을 받지 말며 뜨거운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인(信心人)의 음식을 얻어먹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결심 없이는 대도는 성취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잊지 말고 잊지 말자.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만고 철칙을!

오직 영원한 대자유를 위해 모든 고로(苦勞)를 참고 이겨야 한다.

- 수도8계(修道八戒) 중에서


[불교신문 2758호/ 10월12일자]

데스크승인 2011.10.31  16:52:38 이진두 | 논설위원  

   
봉암사 가는 길로 들어서다 보면 정면 멀리 원추형으로 생긴 흰 바위 봉우리가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우람한 봉우리 전체가 화강암이어서 나무나 풀이 붙어있지 못한다. 한국의 산악 중에서 이런 형태의 봉우리는 유일하다고 한다. 이곳에 근대선원이 처음 개원된 것은 1947년이라 한다. 아래 작은 사진은 가까이서 본 선원 모습. 희양산 봉암사(曦陽山太古禪院)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김형주 기자
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길 313이 현주소다. 점촌에서는 자동차로 20여분 결린다. 성철스님은 1947년 동안거 때 이 절에 와서 이른바 ‘봉암사 결사’에 들어갔다. 봉암사는 신라 말 지선(智詵, 824~882, 智證大師, 호 道憲)스님에 의해 창건되었고 고려 초 긍양(兢讓, 878~956)스님에 의해 다시 창건되면서 희양산파(曦陽山派,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의 중심 사원이 되었다.

고려 초 광종의 칙령에 의해 부동사원으로 지정되고 고려 중기 원진국사, 고려 말 원증국사가 주석한 사원으로 유명하다. 조선 초에는 함허 득통스님이 주석하여 배불론(排佛論)에 맞서는 현정론(顯正論)을 폈다. 현대에는 조계종의 혁신운동인 봉암사 결사운동의 발상지로서 조계종 특별수도원(종립선원)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신라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봉암사의 위상은 각 시기마다 사상사에서 주목되고 있다.(문경시에서 펴낸 <희양산 봉암사>에서 인용)

희양산은 태백산맥이 태백산을 거쳐 남쪽으로 곧게 뻗어 내려오다가 갈지(之)자로 꺾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봉암사 가는 길로 들어서다 보면 정면 멀리 원추형으로 생긴 흰 바위 봉우리가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우람한 봉우리 전체가 화강암이어서 나무나 풀이 붙어있지 못한다.

한국의 산악 경관 중에서 이런 형태의 봉우리는 유일하다고 한다. 이 화강암 바위는 하늘로 치고 올라가는 형상이어서 ‘마치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내달리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봉우리 아래 너른 터에 봉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봉암사에 들어서면 드세고 기가 센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유서 깊은 도량에 근대선원이 처음 개원된 것은 1947년이라 한다.(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편 <선원총람>)

1947년 ‘근대 선원’ 개원…6·25 한국전쟁으로 와해

서암스님 등 원력 힘입어 1970년 수좌들 모여들어

1982년부터 일반인 출입제한…종립특별선원으로 우뚝 서

봉암사 결사로 선원이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봉암사 결사도 1950년 6?5한국전쟁으로 인해 와해되고 그 후 봉암사는 날로 황폐되었다. 1970년 초부터 공부하는 수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전 종정 서암(西庵)스님(1917~2003)의 원력이 있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했다. 봉암사는 1982년부터 지금까지도 산문을 폐쇄해 일반인·등산객·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오신날은 개방한다.

당시 산문폐쇄의 발단이 되었던 정황을 알아본다.

봉암사 태고선원(太古禪院, 1990년 이전엔 희양선원)에는 안거기간 외에도 선승들이 항상 머물며 여법히 정진한다. 1982년 하안거 때 많은 수좌들이 용맹정진하고 있었다. 행락객들이 봉암사 계곡으로 몰려왔다. 사찰경내인 마애불 옆에서 텐트를 치고 숙박과 취사를 했다. 스님들은 이들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곤 했지만 행락객의 그런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선방 스님들은 대중공사를 통해 일반인의 출입을 삼가는 전문수도원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적극 개진했다. 스님들은 사찰의 관광화로 인해 수행환경의 폐해가 심각해 질 것을 감안해 선수행 결사의 성지인 봉암사만이라도 교단의 전문수도원으로 설립해야 한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산문을 닫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자는 의견이 공론으로 채택된 것이다.

결의된 내용을 대중대표 스님들이 당시 종정인 성철스님에게 상세히 말씀드렸다. 성철스님은 대중의 뜻을 치하하면서 1947년부터 실시했던 봉암사 결사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일이 원만히 성사되는데 큰 힘을 주었다.

그 후로 봉암사는 교단의 명실상부한 전문수도장으로써의 면모와 위상을 갖추었다. 그런 후에도 돌광산 개발을 비롯하여 수행환경 파괴행위가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특히 행정당국은 1982년 이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만들어 사찰을 합법적으로 개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 역시 스님들의 의연하고 단호한 대처로 오늘에 이르게 됐다.

2002년에는 산림청으로부터 봉암사와 희양산 일대가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그 후 봉암사 일대의 생태계는 수달이 서식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으며 최근에는 희귀식물 여러 종이 새롭게 발견될 정도로 크게 좋아졌다.

봉암사 일대는 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산세의 빼어남은 이를 것 없고 계곡과 그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 또한 명징하다. 큰절에서 2㎞도 채 못간 곳에 마애불이 있다. 그 앞에는 너른 바위가 평상처럼 펼쳐져 있다. 근 100여명이 이곳에 앉고 서서 야외법회를 할 만한 공간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크고 너른 바위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은 거울 같았다.

그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입으로 바로 넣었다. 봉암사 계곡의 이 물맛은 문자 그대로 가슴 속까지 시원할 정도였다. 그 큰 바위 위에 벌렁 누었다. 오후의 햇살이 마애불 앞에는 그늘이 없어 따사했다. 굳이 큰절 법당 안에서 법회를 열지 않아도 여기에서 법석을 벌인다면 ‘오죽 상쾌하랴’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 행락객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 스님들의 수행환경을 그르치지 않았나 싶었다.

   
봉암사 일주문.
주지 원타스님은 우리 일행에게 차를 권하면서 “성철 큰스님께서는 이 일대와 참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 대승사를 거쳐 봉암사에 머무셨고 1960년대 중반에는 김용사에 계시기도 했잖습니까. 당신이 이곳 봉암사에 오실 때가 세수로는 36세였었지요. 한창 나이, 장년의 나이에 여기서 당신의 큰 꿈을 펼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다.

원타스님 말에 따르지 않더라도 장년의 한 도인이 스스로의 웅지를 활짝 펼치던 곳. 그곳이 바로 봉암사가 아니던가. 그곳에서 행해진 여러 일들이 오늘날 우리 종단에 큰 교훈을 남겼으며 앞으로의 종단이 나아갈 방향에 지남(指南)이 되고 있지 않은가.

봉암사 그리고 봉암사 결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짚어 보는 글을 다음 회에도 이어가 보기로 한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利他

수도의 목적은 이타(利他)에 있으니 이타심이 없으면 이는 소승외도(小乘外道)이니 심리적 물질적으로 항상 남에게 봉사한다.

자기 수도를 위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되 추호의 보수도 이를 받아서는 안된다. 노인이나 어린이나 환자나 빈궁한 사람을 보거든 특별히 도와야 한다. 부처님의 아들 라후라는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한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이라도 귀신도 모르게 한다. 오직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성(自性) 가운데 쌓아둘 따름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 한 푼 어치 착한 일에 만 냥 어치 악을 범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만 손해 볼뿐이다.

예수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오른손으로 남에게 물건을 주면서 왼손도 모르게 하라.” 하물며 우리 부처님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행, 실행 없는 헛소리는 천번만번 해도 소용이 없다. 아는 것이 천하를 덮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털끝의 가치도 없는 쓸데 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고인(古人)은 말하였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나니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말했다. “옳은 말 천 마디 하는 것이 아무 말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오직 실행만 있을 뿐 말은 없어야 한다.

- 수도팔계 중에서


[불교신문 2762호/ 10월26일자]

데스크승인 2011.11.07  15:33:11 이진두 | 논설위원  

   
2007년 봉암사 결사 60주년법회.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이 참여해 결사정신을 되새겼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1947년 동안거부터 시작한 ‘봉암사 결사’는 불교 조계종단 나아가 현대 한국불교사에 획기적인 일로 ‘신화’로 불리기까지 한다. 성철스님은 왜 ‘봉암사 결사’를 했는지, 결사장소가 왜 봉암사였는지, 어떻게 결사를 수행했는지 즉 어떻게 살았는지, 봉암사 결사가 그 이후 불교계에 어떤 영향과 교훈을 주고 있는지 되짚어보는 것 또한 큰 의미를 갖는다.

“봉암사에 들어간 것은 정해년(丁亥年) 내 나이 그 때 36세 때입니다. 봉암사에 들어가게 된 근본동기는, 죽은 청담스님 하고 자운스님 하고 또 죽은 우봉스님 하고 그리고 내 하고 넷인데, 우리가 어떻게 근본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인 원(願)이었습니다. 즉 근본목표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처소는 어디로 정하나? 물색한 결과 봉암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우봉스님이 살림 맡고, 보문스님 하고 자운스님 하고 내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스님은 해인사에서 가야총림(伽倻叢林)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에는 못 들어오고.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성철스님이 생전에 해인사에 있으면서 한 말이다.

   
봉암사 태고선원 입구 묘유문. 김형주 기자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은 이미 대승사 시절 함께 살면서 공동수행체 즉 총림에 대한 구상을 서로 나눴었다. 그러나 청담스님은 1946년 10월께 가야총림이 출범하자 해인사에 갔다.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함께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평소 가졌던 뜻을 펴려했으나 여건이 마땅치가 않아 성철스님은 해인사를 떠나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하안거(1947년)를 지내고 그해 동안거를 봉암사에서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우봉 보문 자운스님 뒤이어 향곡 월산 종수 …

그 후에도 여러 명 동참 특히 묘엄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도 참여해

“그 뒤로 향곡, 월산, 종수(宗秀),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 보경(寶鏡), 법전(法傳), 성수(性壽), 혜암(慧菴), 의현(義玄)이는 그때 나이 열서너 댓 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그 멤버가 한 20명 되었습니다.” 성철스님은 후속 참가자를 이렇게 회상했다.

봉암사 결사에는 그 후 여러 명이 참여했다. 특히 묘엄스님 등 비구니도 참여하여 봉암사 백련암에 머물면서 청담스님 성철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비구니의 참여는 결사를 주도한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성철스님 친필 공주규약(위)과 봉암사 결사 대중 명단  

다시 성철스님의 회고를 보자.

“처음에 들어가서 첫 대중공사를 뭣을 했느냐 하면 … 법당정리부터 먼저 하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습니다. … 그 다음에는 불공인데, 불공이란 것은 자기가 뭣이든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서 스님네가 축원해 주고 목탁치고 하는 것은 본시 없는 것입니다.

이제 법당은 어느 정도 정리되는데 가사니 장삼이니 바릿대니 이런 것이 또 틀렸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에 바릿대는 와철(瓦鐵)입니다. 쇠로 하든지 질그릇으로 하지 목(木)발우는 금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쓰고 있습니다.

가사 장삼을 보면 비단으로 못하게 했는데 그 당시에 보면 전부 다 비단입니다. 색깔도 벌겋게 해서. 순수한 색이 아니고 괴색(壞色, 청색 황색 적색의 3종 색을 섞어 만든 색)을 해야 되는 것이니 당시엔 그런 것도 비법(非法)입니다.

그래서 비단가사, 장삼 그리고 목 바릿대 이것을 싹 모아 가지고 탕탕 부수고 칼로 싹싹 기리고(자르고) 해서는 마당에 갖다놓고 내 손으로 불 싹 다 질렀습니다. 육환장도 새로 만들고 요새는 안하지만 스님은 언제든지 육환장 짚게 되었으니까. 삿갓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죽을 먹었습니다. 공양은 사시(巳時)밖에 없으니까. 오후에는 약석(藥石)이라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율(律)에 보아서는 저녁공양은 없는데 청규(淸規)에는 약석이라고. 약이라 해서 참선하는데 너무 기운이 없어도 안되므로 바릿대 펴지 말고 조금씩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6ㆍ25전쟁으로 중단…2007년 60주년 법회 통해

‘결사 정신’ 되새겨 오늘의 ‘자성과 쇄신’으로 새롭게 이어져

포살(布薩)도 처음으로 거기서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제도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나무를 하는데 식구수대로 지게를 스무 남 개 만들었습니다. 그래놓고 나무를 하는데 하루 석 짐씩 했습니다. 석 짐씩 하니 좀 고된 모양입니다. 고되니깐 몇 이가 도망 가 버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다. 108배를 처음 실시하고 신도가 스님에게 3배 예배하는 법도 이때 처음 한 것이다. 수행차원에서 1000배의 절을 하고 공양은 모든 스님이 평등하게 했다. 천도재 때는 <금강경>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신중단에는 반야심경 독경으로, 운력은 모든 대중이 능엄주를 암송케 했다.

일상생활은 공주규약(共住規約)에 의해 철저하게 수행했다. 공주규약은 성철스님이 작성하고 대중들이 지키겠다는 다짐아래 시행되었다.

총 18개항의 공주규약은 지금 보면 한문으로 된 것이어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부처님 가르침을 부지런히 닦아 구경각을 하루속히 성취한다.

2.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 가르침 이외의 각자 의견은 절대 배제한다.

3. 일상생활은 자주자치의 기치아래 물 긷기, 나무하기, 밭 갈기, 바느질, 탁발 등 어떠한 고역도 마다않는다.

4. 소작인이 내는 것과 신도의 시주에 의한 생계유지는 단연 청산한다.

5. 신도의 불전 헌공은 재례 지낼 때의 현품과 지극정성으로 하는 절(拜)에 그친다.

6. 대소변 때와 운력 그리고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장삼을 입는다.

7. 바깥출입 때는 반드시 삿갓 쓰고 석장(錫杖) 짚고 여럿이 함께 간다.

8. 가사는 마(麻)나 면(綿)에 한하고 괴색이어야 한다.

9. 바루는 질그릇 이외의 것은 금한다.

10. 매일 1회 능엄주를 왼다.

11. 매일 2시간이상 노동한다.

12. 보름마다 포살을 시행한다.

13. 불전헌공은 오시(午時, 오전11~오후1시) 이후는 안되며 아침식사는 죽으로 한다.

14. 좌차(앉는 차례)는 비구계를 받은 순서로 한다.

15. 방안에서는 면벽좌선하고 잡담은 엄금한다.

16. 정한시각 이외에는 눕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17. 각자 쓸 물자는 스스로 마련한다.

18. 이외 것은 청규와 율에 정한 바에 따른다.

이 사항을 거부하는 자는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는 3년도 채 못 되어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그치게 되었다.

지난 2007년 조계종단은 봉암사에서 결사 60주년을 기념하는 큰법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종도들은 당시의 결사정신을 되새기고 깊이 참회하고 앞으로의 수행 자세를 다시 한번 곧추세웠다. 오늘의 ‘자성과 쇄신’을 이끌어 낸 봉암사 결사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이어져야 할 것이며 보다 더 깊고 다각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자기의 본래 모습이 부처님이다 

물음 :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는 융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여 절대적인 창조주가 화복(禍福)을 정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업(業)에 따라서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하게 되고 악한 일을 하면 불행하게 된다고 하는 데 이해가 어렵습니다.

답 : 예수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만든 이도 하나님이고 따라서 구원도 그에게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누가 만든 사람이 따로 없고 누가 따로 구원해주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아(自我)본위입니다. 예수교는 철두철미 남을 의지하는 것이니 두 관점이 정반대입니다. 요즘의 과학적 증명에 의하면 남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말했듯이 예수교에서도 자체 전환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본시 주장하는 것은 우주 이대로가 상주불멸(常住不滅)이고 인간 이대로가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며, 또 사람이나 짐승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사람이 모두 금덩어리 아님이 없는 데 자기가 착각해서 금덩어리를 똥덩이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금덩어리인줄 모르는 것이니 수행을 하여 본래 눈을 뜨고 보면 본시 금덩어리인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모두 진금(眞金)이고 모두가 부처님 세계이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원’한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개발이고 자기복기(復歸)입니다. 자기의 본래 모습이 부처님인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의 조사스님네들이 항상 하는 말이 그렇고 또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석가도 믿지 말고 달마도 믿지 말고 지금 말하는 성철이도 믿지 말라. 오직 자기를 바로 보고 자기 능력을 바로 발휘시키라.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 1968년 8월 대불련 수련법회

[불교신문 2766호/ 11월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