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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가 참 좋습니다.”
“그럼, 명당이지.”
대숲의 고장 전남 담양.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이 일렬로 늘어선 메타스콰이어 나무가 형성한 띠 너머로 보인다. 읍내 뒤에는 다시 추월산과 병풍산 삼인산이 서로 어깨를 걸고 든든하게 뒤를 지키고 섰다.
언제 봐도 지겹지 않을 그 풍광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 대숲이 포근하게 감싸 안은 곳에 마하무량사가 있다. 5년 전부터 터를 다지고 법당과 요사를 지어 온 여산 스님. 세상에는 ‘암도(岩度)’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스님이다. 젊은 나이에 철학박사학위까지 받은 스님은 조계종 포교원장과 교육원장을 역임하고 수도승(首都僧, 서울 스님) 생활을 마감한 뒤 백양사 운문선원에서 젊은 수좌들과 3년간 안거를 난 뒤 이곳에 아담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수도승(修道僧)다운 귀산(歸山)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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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바꾸신 겁니까?”
“이름이 바뀐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암도로 살아 온 시간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여산으로 살아보려는 거야. 여산, 이 두 글자는 참으로 큰 의미를 품고 있어. 산처럼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산이야말로 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지 않은가. 철따라 꽃피고 낙엽지고 눈 내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람이 오고가도 늘 그대로 있잖아.”
“요즘도 법문을 다니십니까?
“자주는 안 다녀. 늙으니까 불러주는데도 없어. 가까운 곳에서 오라면 가고 멀리서 오라고 해도 달려가는데 말이야. 그래도 그렇게 법문 다닌 덕분으로 이런 절이나마 일구고 살지. 요즘은 일하는 게 전부야. 일이란 게 끝이 없어.”
한때 여산 스님은 법문 잘하고 많이 하기로 국내 최고였다. 수첩에는 늘 법문 일정이 빼곡했다. 하루 다섯 곳에서 법문을 한 것이 최대기록이다. 포교사로서의 남다른 열정이 법문을 많이 하게 했고 법문을 많이 하다 보니 말하는 ‘기술’도 늘었다. 그래서 ‘여산 스님의 법문은 장소팔 고춘자 만담보다 재미있다’는 얘기가 날 정도였다. 껄쭉한 이야기에서 매끈한 이야기, 요절복통할 재담에서 눈물을 쏙 빼는 훈계에 이르기까지. 지난 20여 년 간 스님이 대중법문을 한 횟수는 6500여 회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도 스님의 법문 테잎은 성지순례 다니는 버스에서 단연 손꼽힌다.
요사채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멀리 읍내 쪽을 바라보니 역시 경치가 좋았다.
“절터가 정말 좋습니다. 사람 사는 마을과 그 마을을 둘러싼 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이채롭습니다.”
“명당이라니까. 어떤 자리를 명당이라고 하는지 아는가? 밝은 곳이 명당(明堂)이야. 도선국사나 무학대사가 땅을 괜히 고른 게 아니거든. 땅에는 기운이 있기 때문이야. 좋은 땅에서는 그 기운이 올라오는 혈(穴)이 있는데 그게 아주 작아. 볼펜 끄트머리 정도라고 해. 그 혈을 중심으로 집을 짓고 살면 좋다는 것이지. 묘도 마찬가지고. 옛날 절에는 금당(金堂)이라고 하는 건물이 있잖아? 그 가람의 중심이지. 나는 금부처님이 모셔진 곳이라서 금당이하고 하는 줄 알았어. 금당 터가 바로 명당의 혈이야. 땅기운과 물기운 불기운과 바람기운이 하나로 모여서 돌아가는데, 순행을 하는 곳이 좋은 곳이고 난행(亂行)을 하는 곳이 나쁜 곳이라고 보면 돼. 순행을 하는 곳은 생기복덕지(生起福德地)라 하지.”
초가을 햇살이 요사 마루로 가득 들어왔다. 비스듬히 파고드는 햇살이 따가웠다. 자리를 법당으로 옮겼다. 문을 활짝 열어젖힌 법당에서 보니 먼 산이 더욱 장엄해 보였다.
“여기까지 온다기에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스님께서 얘깃거리로 고민을 하신다니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냐, 난 법문을 그렇게 많이 다녔지만 항상 가기 전에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고 메모하지.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하면 그게 어디 법사인가? 만담가지.”
그리고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펴놓으신다. 한자와 영어와 한글이 섞인 메모다. 스님의 법문은 대숲 그림자가 법당 앞마당에 이르도록 이어졌다.
자, 부처님 경전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는데 내 얘기는 여시아사(如是我思)로 시작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쯤으로 말이야. 내 생각을 중심으로 하는 말이니 틀린 것이 있어도 내가 틀리는 것이지 부처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 그렇게 알라고.
오늘은 웰빙 얘길 좀 할까 해. 웰빙 시대라고 하니까 말이야. 사람들은 웰빙을 ‘참 살이’라고 번역하는데 그건 잘못 된 번역이야. 참살이가 있으면 거짓 살이도 있다는 것이 되잖아. 사는데 참과 거짓이 있을 수 없지. 살아 있는 자체가 얼마나 숭고한 일인데 그걸 참과 거짓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나는 웰빙을 그냥 그대로 ‘잘 살이’라 읽어야 한다고 봐. 잘 살기란 말이지. 우리가 중생심에 물들어 잘살지 못하니까 잘살려고 노력하는 거잖아. 그게 공부고 수행인거야. 그러니까 ‘잘 살이’라 하면 잘살고 잘못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잘살려고 노력하는 의지를 포함한다는 말이지. 웰빙은 잘살기 운동이거든. 사람에게는 힘이 필요해. 살아가는 힘, 파워 말이야.(이 대목에서 스님은 두 팔을 올려 주먹을 힘차게 쥐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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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웰빙 시대라고 하는 풍조를 보면 주로 먹는 것만 생각하는 것 같아. 물론 잘 먹는 게 잘 사는 길이지만 지나치게 먹는 것에 치우쳐서 웰빙을 이해하려 하면 잘못이지. 웰빙은 먹는 것을 포함해 육체와 정신생활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니까.
먼저,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알아볼까?
음식을 잘 먹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골고루 먹는 것이고 다음은 제때 먹는 거야. 골고루 먹는다는 것은 편식을 하지 않고 적당히 먹는다는 의미지. 제때 먹는다는 것은 일정한 시간에 먹는 것인데, 부처님은 꼭 사시(오전 10시~11시)에만 음식을 드셨지. 그런데 이 ‘제때’라는 게 말이야, 그 ‘제’자(字)가 ‘배꼽 제(臍)’자도 있거든. 그러니까 제때 먹는다는 것은 배꼽에서 신호가 올 때 먹는다는 것이지. 그렇게 음식을 골고루 제때 잘 먹으면 힘이 생기지.
또 물을 잘 먹어야 해. 음식이라 할 때 음(飮)은 바로 물을 마신다는 뜻이야. 물은 아무리 많이 마셔도 탈나지 않아. 물론 맑고 깨끗한 물을 마셔야 하고. 자주 마시면 병균도 방출시키지. 요즘 신종플루 공포가 대단한데, 물을 많이 마시라고 권하잖아? 예부터 자시(子時)에 마시는 물이 좋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 시간을 기해서 물의 성질이 바뀌기 때문이라고 해. 차도 마찬가지야. 물을 많이 마시라는 말에 차도 포함되는 거야. 물을 잘 마셔야 정력(精力)이 생겨.
다음으로 잘 먹어야 할 것은 공기야. 공기도 먹는 것이냐고 하겠지만, 공기도 잘 먹어야 해. 수행에서 호흡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바로 그 이치야. 숨을 깊이 쉬고 길게 쉬는 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지. 그렇게 호흡하면 정기(精氣)가 나와.
또 마음을 잘 먹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지. 스스로 정신을 맑게 하고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융통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 그것이 산과 같은 마음 아니겠어? 우리가 먹어야 할 마음은 진실한 마음, 착한 마음, 지혜로운 마음이야. 이를 청정 원만 지혜라 할 수 있는데, 탐내고 성질부리고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지. 이 마음을 잘 먹고 사는 것이 진선미의 삶이야. 마음을 잘 먹고 살면 좋은 생각이 나오고 늘 밝고 건강하게 살게 되는 거야.
마지막으로 잘 먹어야 할 것은 바로 나이야. 사람은 나이를 잘 먹어야 해. 나이를 잘 먹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답게 사는 것이지. 자신의 본분을 알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분수껏 행동하는 게 나이 잘 먹는 길이지. 그렇게 나이를 잘 먹으면 뭐가 생길까? 나이를 잘 먹으면 지혜가 나오지. 흰머리는 누구나 나이 먹으면 나오지만, 지혜는 진짜 나이를 잘 먹은 사람에게만 나오는 거야. 결국 지혜롭게 잘 사는 방법, 그것이 웰빙이라 할 수 있는 거야.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은 그렇고, 이제 멋지게 잘 사는 방법을 생각해 볼 차례군. 나는 다섯 가지의 힘(五力)이 있어야 멋지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오력이 무엇이야 하면, 우선 체력(體力)이야. 몸이 튼튼해야지 비실비실한 몸으로 멋진 삶을 살 수 있겠어? 체력을 갖추기 위해서 앞에 설명한 먹는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 다음은 재물(材力)이 있어야 잘 수 있어. 물론 돈의 힘을 믿고 의존하라는 것은 아니야. 정당한 방법으로 떳떳하게 벌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이웃을 위해 잘 쓰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야. 세 번째는 정신력(精神力)인데, 이를 스님들에게 접목하면 법력(法力)이라고 하더군. 정신력은 그 사람의 생존에 중요한 힘이지. 정신력이 튼튼하기 위해서는 흔들림 없는 믿음의 힘이 필요하고 깊은 선정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의 힘도 필요하지. 믿음의 힘은 자신의 주체의식을 길러주고 안정된 삶을 가능하게 하지. 바르고 강한 정신력은 엄청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부단한 수행의 자세를 유지해야 해. 정신력을 바로 얻지 못하면 멋진 삶을 살 수 없어.
네 번째 힘은 권력(權力)인데 이것은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잘 들어야 해. 권력은 내가 부리는 것이 아니고 남이 인정해 줄 때 진정한 힘이 나와.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의지를 앞세워 권세를 부리는 것은 권력이 아니야. 남의 존중을 받을 수 있어야 진짜 권력이지. 그러니까 멋지게 살려면 자신에게 있는 힘을 자신이 아닌 남의 이익을 위해 쓸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마지막으로 매력(魅力)이 있어야 멋지게 살 수 있어. 매력이란 게 다른 것이 아니고, 정직하면 돼. 정진하게만 살아도 그 사람은 엄청나게 매력적인 사람이야. 요즘은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세상인데 자신과 남에게 늘 정직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어? 잘 살기 위해 갖춰야 할 다섯 가지 힘을 잘 기억하고 그걸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이 웰빙이지.
웰빙, 다시 말해 ‘잘 살이’를 하려면 바르게 살아야 해. 정직해야 하거든. 삶의 바른길을 부처님께서는 여덟 가지로 가르치셨어. 바로 팔정도(八正道)야. 그 핵심은 몸과 입과 마음을 바르게 쓰는 것이지. 그것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이고 이 삼업을 잘 닦으려면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제대로 알고 지켜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알고 모르고를 떠나 순간의 욕심에 끌려 살아버리니까 세상이 혼탁한 거야.
우리가 쓰는 말들을 가만 생각해 봐. 문자에는 여러 의미가 중첩되어 있거든. 중 승자(僧)를 보자구. 사람 인(人)변에 일찍 증(曾)인데, 이걸 보통 ‘일찍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석하거든. 퍽 고상한 해석이지. 그런데 어디 그런가? 나는 차라리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낫다고 봐. 그렇게 고상한 이름을 가지고 승이랍시고 권위를 부려대니까 세상 사람들은 불교계에 진짜 수행하는 사람들은 없는 줄 알잖아? 승려(僧侶)라는 호칭은 이제 직능직 명칭이 되어 버렸어.
그래서 웰빙이라고 할 때, 잘 먹고 잘사는 것도 중요하고 멋지게 잘사는 것도 중요하고 바르게 잘 사는 것도 중요한 거야. 바르게 잘 사는 길은 누구나 잘 아는 팔정도가 제시되어 있고 그 핵심이 삼업과 삼학이란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봐.
이제 마지막으로 참으로 잘 사는 길을 설명해볼까? 그것도 이미 제시되어 있는 불교의 기본교리야. 육바라밀이거든. 남을 위해 보시하고[布施] 스스로 청정한 생활을 하고[持戒] 들끓어 오르는 욕망을 제어하여 참을 줄 알고[忍辱] 늘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라가고[精進] 마음을 고요하고 차분하게 유지할 줄 알고[禪定] 지혜(智慧)의 삶을 누려 나가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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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멋지게 살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진짜 웰빙인데 그 길이 다 부처님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불자로서 얼마나 행복하겠어? 부처님 가르침은 산같이 큰데 우리 소견이 좁아서 문제지.
산그늘이 마하무량사 마당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공양간 노보살님이 차려놓은 소박한 밥상, 시래기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공양간에도 여산 스님의 ‘웰빙 법문’이 가득 차 있음을 실감했다.
여산 스님은
1939년에 출생해 열일곱 나이에 백양사로 출가 했다. 은사는 서옹(西翁)스님. 1972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입학해 만학을 시작, 197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와포교원장 교육원장 등을 역임하며 포교와 교육 불사에 진력했다. 백양사 주지(1980년)와 중앙승가대 교수도 역임했다. 전국 법회 현장을 쉴 새 없이 다니며 법문 했으며 공직을 사임하고 운문선원에서 3년간 정진 했다. 현재는 전남 담양읍에 마하무량사를 창건, 경전 연구와 좌선을 하며 텃밭도 가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