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일어나기 전 소식을 알기 위한 것이 화두, 따져 알려고 해선 안됩니다.
공부 짓는 법, 그 길을 화두결택이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법을가린다 그 말입니다.
공부하는 바른 법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전,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 ‘공부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물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공부하는 법을 모르면서 절에 다니고, 철야 공부를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공부하는 법은 의심없이 알아야 합니다.
서울에 갈려면 서울 가는 길을 바로 아는 것이 제일 큰 문제 아닙니까. 서울 가는 길도 모르면서 남대문을 찾고, 동대문 시장은 어떻게 벌어져 있고, 제일극장은 어떻고, 요릿집은 어디고 하면서 말만 많습니다. 서울에 가지도 않으면서 말만 벌여 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배고플 때 그림의 떡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의심이 나면 묻고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그렇게 헛고생을 하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화두 공부가 수월한 것 같으면서도 어렵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이 ‘이 뭣고’ 하니, 천하에 쉽지 않습니까.
화두(話頭)라는 것이 조사공안(祖師公案)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공부하게 하기 위해서 문제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설파한 것입니다. 불법의 종지, 골수를 바로 일러주는 말입니다.
일러줄 때 바로 알면 공부할 일이 없어지는데, 관새음보살을 부르는 것이 ‘이 뭣고’할 때, 몰랐거든요. 모르니 의심을 안 낼 수 있습니까.
부르는 것이 ‘이 뭣고’.
부르기만 했지 부르는 것을 모릅니다.
앞에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알기 위해 ‘이 뭣고’가 나오게 되었고, ‘이 뭣고’ 할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을 부르듯 ‘이 뭣고’를 한다면 억만 년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문제를 알려는 것이 목적이지 소리 자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화두마다 끝에 ‘이 뭣고’가 붙습니다.
알려고 의심을 내는데, 세상의 공부인 과학이나 철학공부처럼 사량분별로 따져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지면 도(道)공부가 아닙니다.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인가?’ 그렇게 분별심을 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따집니다. 그렇게 공부한다면 엉터리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압니까.
‘내가 마음이니, 사람들아 나 보고 마음이라고 불러라’ 그런 예는 없었습니다. 서로 통하고 살려니까 마음이니, 사람이니 개니 부처니 차별을 두어 이름을 지어 놓았을 뿐이지, 부처도 개도 사람도 마음도 아닌 것입니다. 말이나 글자는 허망할 뿐 실물이 아닙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 소식을 알기 위한 것이 화두인데, 따져 알려고 해선 안됩니다. 억만 년을 따져도 모릅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미묘법입니다.
불법의 골수를 바로 일러주는 말, 화두
고 혜암스님(조계종 종정, 해인총림 방장)
출처 : http://blog.daum.net/mr4242/9894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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