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스크랩] 설우 스님

희명화 2011. 11. 3. 09:17

우리 시대의 선승을 찾아서 - 청주 법인정사 선원장 설우 스님

부처가 부처로 부처행을

하는 것이 선禪


김성우(禪  수행자, 본지 편집위원)

 북 청주시에서 동부 우회도로를 따라 가다 중리 마을로 들어 간 뒤 500미터 지점에서 다시 좌회전, 우회도로 밑으로 난 터널을 통과하면 야트막한 산이 보인다. 논길을 가로질러 우암산 자락으로 올라가면 산 중턱에 법인정사(선원장 설우 스님)가 늠름한 자태를 드러낸다. 전통 사찰은 아니지만 전통과 현대의 건축 양식이 조화된 아름다움이 산세와 어울려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법인정사가 청주 시내에서 승용차로 달려 5~10분 거리에 위치한 산자락에 자리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참선을 통해 불법을 전하면서도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로 시민들이 지친 심신을 쉬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는 수좌 출신이면서도 선(禪)의 대중화에 큰 뜻을 품어 온 설우 스님의 오랜 원력에 기인한 것이다.
대적광전에 올라가 참배한 후, 주지 무아 스님의 안내로 설우 스님이 주석하는 요사채로 들어갔다. 커다란 대나무 선묵화(禪墨畵)가 걸려 있는 넓은 다실(茶室)에 스님과 마주 앉아 보이차를 음미하며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선(禪)이 무엇인가를 여쭈었다.
"부처가 부처로서 부처행을 하는 것이 선(禪)입니다. 선은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해서 정법안장 열반묘심의 정안을 구족한 선승들이 일상생활에서 평상심으로 수용해 그대로 드러내는 자리이죠. 따라서 선은 실천 불교인 것입니다."
설우 스님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과 반야의 자연지가 구족되어 있는 사실을 자각하면 곧 바로 돈오(頓悟: 단박 깨침)"라면서 "이를 통해 참된 깨달음을 체득함으로써 보살의 서원과 원력으로 회향하는 자비의 삶이 실천된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설우 스님은 "육조 스님이 자성이 본래 청정한데 더러운 것 붙을 것이 어디 있고, 닦을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한 말을 강조하면서 바른 안목으로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우리 불교의 현주소가 기복 신앙에 머물고 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불성(佛性) 사상의 정립을 통해 '모두가 부처'라는 의식의 전환부터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중생이고, 너는 부처'라는 생각은 평등 사상을 불러올 수 없으며, '나'라는 개념으로 인해 진정한 보살행의 원이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견성하지 못했더라도 내가 부처라는 사상적 확립만 있다면, 모두가 부처이기에 서로 존경하고 공경하게 되며 평등 사상이 자연스럽게 정립되어 각종 사회의 부조리도 치유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부처로서 부처행을 하지 않았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회가 될 때 조사선(祖師禪)의 꽃인 보살의 만행이 나오게 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설우 스님이 강조하는 불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불성이란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불성은 중생심의 본질적인 자성청정심을 말하며, 연기법으로서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는 세계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생 속에 부처의 작용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육조 스님이 말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도 불성 자리를 성취하려면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정견 자리는 선과 악이 정해진 실체성이 없는 것이요, 연기법에 의해 드러낼 뿐이라는 뜻입니다. 혜능 스님은 중생이 부처이고 번뇌가 보리이며,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곧 부처다)의 본래불을 깨달아 자기 부처를 바로 봐야 한다는 평등 선언을 한 것입니다."
불성을 보고 본래불을 깨닫는다고 할 때의 '견성'과 '깨달음'에 대한 입장 역시, 누구나 '본래 깨달아 있다〔本來成佛〕'는 대전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스님은 "깨쳤다는 말은 원래 부처라는 것을 체득하여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즉, 돈오란 '나는 부처다,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며, 돈수(頓修: 단박에 닦음)는 부처의 행을 말한다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로 가야 하고 중생이 뭘 세워서 점차 닦아 계단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유위법(有爲法)이 아닌 무위법(無爲法)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조사선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깨달음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생사심(生死心)을 해결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중생을 이고득락(離苦得樂)케 하려는 보살의 서원, 연기적 현상을 직시하는 삶의 가치관 정립 위에 이뤄지는 참된 발심이 수행 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육조 스님을 중심으로 한 정통 조사선에 따르면, 불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과 좌선, 삼매의 개념과는 달리 철저한 무위법을 지향한다. 설우 스님은 이러한 용어들을 일상 속의 수행과 연관해서 알기 쉽게 설명했다.
"일체만법의 경계를 당해도 본래 진여불성 자리(생멸 없는 공한 자리)를 관하는 것을 '선(禪)'이라 합니다. 아울러 그 경계에 집착하고 물들거나 흔들림이 없는 것을 '좌(坐)'라 하고, 모든 존재 현상에 살면서도 존재 현상에 구속을 당하거나 속박을 당하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합니다. 안으로 한 생각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 하고, 이것을 선정 삼매라 합니다."
조사선의 실질적인 주창자인 혜능 스님은 불지견(佛知見)이 중생의 마음속에서 본래 자연지로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믿을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면서 불성 사상의 구체적인 실천 사상으로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을 것을 설했다. 조사선 수행의 요체인 무념, 무상, 무주의 실천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설우 스님은 간명하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무념은 부처로서의 실천행으로 모든 생각을 하지 않고 의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생각이라도 어느 한 경계나 사물에 대하여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무상은 상을 떠난 것으로, 자기 색신 속의 자성 삼신불에 귀의하게 하여 청정한 마음달이 바로 자성불임을 확신하면서 바로 지금 즉신성불(卽身成佛)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무주는 사람의 본래 성품이 한 생각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모두 부처다. 하지만 부처처럼 살고 있는가?"
설우 스님이 말하는 조사선의 공부법은 결코 좌선과 화두만을 강조하는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좌선 지상주의가 '절름발이 선'이 될 것을 경계했다. 간절한 발심으로 의정을 세워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것은 거친 번뇌를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갖게 함으로써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공부가 가능하도록 한다. 그러나 불법에 대한 안목을 갖지 못한 채 앉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이것이 도리어 병이 되고 만다. 좌선할 때만 집중할 수 있다면 바쁘게 움직이며 생활할 때는 공부가 깊어지기 어렵다. 오히려 좌선이 부족하더라도 '본래부처'임을 확신하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움직이나 화두를 드는 것이 더 힘있는 공부법이란 것이다.
그래서 설우 스님은 정견과 굳은 신심을 매우 중요시한다.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본성자리는 본래 부동한 자리에서 인연을 수순하면서 어느 한 곳에 머무르는 자리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정견이다. 또한 신심이란 본래 성불을 믿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믿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면서 확신하라는 것이다. 스님이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信心不二〕 둘이 아님은 믿는 마음이니〔不二信心〕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言語道斷〕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로다〔非去來今〕"라는 『신심명』의 마지막 구절을 애송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방을 다니던 시절 내 걸망 안에는 늘 『육조단경』, 『채근담』과 함께 『신심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신심명』을 외며 도량석을 한 것도 꽤 오랜 습관이었죠. 후학들을 위해 많은 강의를 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꼭 『신심명』을 강조합니다. 적어도 수좌라면 『신심명』은 외고 있어야 해요. 『신심명』만큼 중도(中道)의 실상을 잘 드러내고 정견을 바로 서게 하는 어록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지극한 도는 본래 갖춰져 있지만, 이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취사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없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 이름을 붙이는 데서 시비가 생기고 스스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간택심과 분별심을 버려라. 그러면 본래 그대로다' 『신심명』이 말하는 본래자성이야말로 수행자가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찾아야 할 좌우명이란 게 스님의 생각이다.
청주 법인정사 대적광전.
설우 스님이 『신심명』을 좋아하는 까닭은 이 글의 저자인 승찬 스님이 문둥병에 걸려 고생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우 스님도 한때 병으로 고통을 받았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마저 포기했을 때 느꼈던 절망감. 『신심명』을 품고 살며 건강을 추슬렀던 지난 시절, 얼마나 깊은 고뇌와 발심이 있었던가. 5년간의 투병 생활 중에서도 공부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스님은 오히려 무상을 실감하고 크게 망상을 쉬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병마(病魔)가 오히려 굳은 신심과 공부에 힘을 얻게 한 선지식이 된 셈이다.
설우 스님은 1971년 상주 원적사에서 원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사미계를 받고 곧바로 선방에 들어갔다.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수도암, 도성암 등의 여러 선원에서 25안거를 성만했다.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정진의 끈을 풀지 않은 까닭에 스님의 공부는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참선과 보살행원이 조화된 공부가 살아 있는 수행임을 몸으로 체험했기에 거듭 역설하는 것이다.
"믿음만 있고 생활 속에서 실천 수행을 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없으면 안됩니다. 간화선 수행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바른 신심을 바탕으로 '내가 본래 부처라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 즉 분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확실하지 않으면 간화선 수행이 관념에 그치게 되고 생각으로 떠돌면서 생활화되지 않는 폐단을 낳게 됩니다."
생활 따로, 공부 따로인 수행자는 야구 해설가처럼 이치에만 밝은 뿐 실제 야구시합에서는 선수들처럼 완벽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때문에 스님은 신도들에게 좌선과 함께 선법문, 경전 공부, 보살행을 두루 닦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사내에 불교 대학을 세워 신도들이 교학의 기초를 닦고 스님의 지도로 좌선과 선법문을 배워 안목을 키우며, 불우 이웃 돕기 봉사 단체인 '불지촌' 자원 봉사를 통해 실천력을 기르는 것이다. '조계종 『간화선 수행지침서』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조계종 교육원 교육제도개선위원회 위원승가고시 위원기본선원 교선사를 맡아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것도 같은 보살만행의 일환이기는 마찬가지다.
"모두 부처다. 하지만 부처처럼 살고 있는가? 부처가 부처로서 부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 속에서 과연 얼마나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묻는 스님의 말씀에, 아직 실천행이 부족한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상경하면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내 '부처행을 하고 있는가?'라는 반문이 화두가 되었으며, 그후에도 이것은 여전히 삶의 지표가 되어 따라 다니고 있다.

 

이 글을 월간 <<선문화>>에 발표한 글입니다.

구도역정 http://cafe.daum.net/kudoyukjung

출처 : 求道歷程(구도역정)
글쓴이 : 푸른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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