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스크랩]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더니 지금 다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희명화 2011. 11. 3. 09:15
선의 메아리∥지금 이 마음을 바로 보라|

일오 스님(월명암 사성선원장)

 

지금 이 마음을 바로 보라

 

 





 (주장자 들어보이며) 잘 보십시오. (주장자 내려치며) 잘 들어보십시오.

 이 주장자를 잘 보고 주장자 소리를 잘 들어서 보고 듣는 가운데 알아 차렸다면 오늘 법문 잘 들으신 것입니다. 똑같은 주장자 들어 보이고, 낸 소리 보일지언정 특별한 뜻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주장자를 보고, 소리를 듣는 거기에 초점이 있는 줄 아셔야 합니다.
 ‘마음이 부처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죠. 무엇이 보고 무엇이 듣습니까? 마음이 듣고 마음이 보지 않습니까.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한다는 것도 곧 마음수행입니다. 이 마음 깨닫자고 해서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는 것입니다. 참선을 한다는 것도 이 한 마음을 깨닫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화두참선을 해도 확실히 알고 해야 합니다.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過去心)도 현재심(現在心)도 미래심(未來心)도 다 ‘불가득(不可得)’이라 했습니다. 잡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현재심마저도 불가득이라 했지만 우리는 어느 곳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든 현재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 현재 순간을 여의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음을 떠나서 부처 따로 없다” 하는 것이 그 도리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영명연수(永明延困)선사와 같은 훌륭한 스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부를 하는데 기특한 법이 따로 없다.” 제가 볼 때 부처님 법은 무엇을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세웠다면 안 되는 겁니다. 
 현 순간, 내 모습을 보고 내 소리를 듣는 이것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걸 잘 살피셔야 됩니다. “기특한 법이 따로 없다. 다만 너희들이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살아오면서 익혀온 마음속의 업장(業障)을 녹여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했습니다. “일체망상을 버리고 모든 오욕(五欲) 경계를 대하더라도 거기에서 목석과 같을 수 있다면 너희들이 설사 도안이 밝히지 못해도 청정성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했습니다.

 

 정견(正見)을 가지려면 연기를 이해해야

 

 우리 공부를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살아오면서 익혀온 업놀음을 쉬지 못해 공부를 성취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선 업장을 소멸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업장만 다 소멸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염불, 기도, 주력, 참선 등 다양한 수행법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 깨닫는 법, 마음 밝히는 법이라 했지만 바꾸어 말하면 ‘업장을 소멸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견해를 바르게 가질 수 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법문하셨습니다. 그래서 팔정도에 정견(正見)이 먼저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견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포함되겠습니다마는 모든 것을 연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견해를 말합니다.
 부처님 말씀 중 가장 핵심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세 가지입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의 연기적 현상으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래서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본다, 연기를 보는 자 나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핵심내용이기 때문에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끝내고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경전 내용에 연기를 깨달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근년에 어느 스님이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선종에서는 마음을 깨달으라고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합니다. 똑같은 내용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가 다르고 선종에서의 연기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연기를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연기를 깨닫습니까? 우리 마음이 깨닫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종에서 오직 일심(一心)만 깨달으라고 권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 법을 펴러 나오셔서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한 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 아닙니까. 이것이 곧 연기를 설명한 것입니다. 고와 집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현상계를 우리들처럼 즐거운 것으로 보지 않고 괴로움으로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보다는 우리 안에 쌓여 있는 괴로움을 중점적으로 더 말씀하셨습니다. 이 괴로움의 원인을 말한 것이 ‘집’입니다. 그래서 그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서 소멸시키는 것이 멸도인데, “고집은 생멸문(生滅門)이요, 멸도는 함멸문(陷滅門)이라”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생겨나는 과정을 여실히 관찰한다면 무(無)를 주장하지 아니 할 것이다. 멸에 없어지는 과정을 여실히 관찰한다면 유(有)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곧 이것이 연기이기 때문에 조건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제행무상 제법무아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를 설명하시는 것도 근본낙처는 우리 ‘마음 도리’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마음, 마음 하는 것도 연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찰나생 찰나멸 연속하는 것이 마음

 

 ‘나’가 무엇입니까? ‘나’ 할 때는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가르켜 ‘나’라고 하죠. 모든 사람들이 각자 ‘나’라고 하는 것을 하나쯤은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 이루어져야만이 그것이 행복하게 잘 사는 길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똑같은 공통심리 중의 하나는 오욕락(五慾樂)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칭찬하고, 내 뜻에 따라주고, 나에 순종하고 훌륭하다고 치켜주기를 바라고, 내가 하는 것 다 따라주기를 바랍니다. 이 나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고 내 뜻대로 내 욕망 성취하려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모든 허물이 여기서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 업장 소멸하는 방법들이 많이 있지마는 ‘나’라고 하는 것을 바로 관찰할 수 있을 때 이러한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해서 여기에다가 중점을 두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분석했습니까.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그랬습니다. 제가 스님생활을 하다가 스님들과 신도님들에게 ‘오온(五蘊)’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죠”라고 합니다. 누가 오온이 색수상행식인지를 몰라서 묻는 겁니까. 오온이 색수생행식인줄 알면서 더 이상 정답을 못 내립니다. 색수상행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색수상행식이 나를 이루고 있는 요소입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현상계가 다 무상한 것이다. 그 가운데 내 몸도 포함됩니다. 왜 무상하냐?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집니다. 그래서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 기운으로 합쳐진 것으로 보지 않습니까. 색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것이 내 몸입니다. 수상행식은 우리 마음을 세분화 해 놓은 것입니다. 이 ‘나’라고 하는 것을 분석해 보니까 전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어리라고 하는 것은 제행무상이라고 해서 지금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인연이 다하면 버려야 할 허망한 것입니다. 왜? 순간순간 변해가고 있으니까. 처음에 태어난 순간을 ‘나’라고 해야겠습니까, 지금의 이 순간을 나라고 해야겠습니까, 몇 십년 후 늙은 그 순간을 ‘나’라고 해야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것은 불명성을 가지고 본래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수상행식이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입니다. 육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은 여섯감각을 가리키고 이것이 육경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대상을 가집니다. 거기에서 분별의식이 일어나는 것이 육식입니다. 이 육식이 한데 똘똘 뭉쳐져 가지고 ‘내 마음’이라고 그럽니다. 소중한 내 마음이라고 하는데 허망한 거라는 겁니다. 본래 존재하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 마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대상을 두고 일어난다 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 불변성을 가지고 이대로 존재하고 있는 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공(空)’으로 표현했는데, 부처님 초기경전에 보면 ‘무(無)’와 ‘무실체(無實體)’입니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실체적으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 일어난 것입니다.
 인연따라 일어났기 때문에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은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하루 동안 만 번 일어났다가 만 번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 한 번 태어났다가 죽는 것만이 생사라 보는데 그렇게 보면 안 됩니다. 찰나생 찰나멸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한 군데 고요하게 머물러주지 않고 자꾸 변합니다. 변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연기입니다.
 인연도리에 의해서 ‘찰나생 찰나멸’한다는 인연 도리를 안 우리는 항상 좋은 마음을 일으켜 행위를 좋게 해야 됩니다. 찰나생 찰나멸 하면서도 연속성입니다. 앞 마음의 영향을 받아서 뒷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각을 잘 다스림으로 인해서 착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다음 생각도 착한 생각이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생각 갖고 있으면 뒷생각도 좋지 못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업을 순현보, 순후보, 순생보 셋으로 나누어 놓았죠. 내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뒷생각이 거기에 상응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순현보입니다. 인과(因果)를 바로 받는 것이 이 도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살아야 합니다. 이 도리를 알면 한 순간도 소홀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악을 그치고 선행을 해라, 복을 지어라, 지혜를 닦아라, 남한테 보시해라” 했습니다. 이 도리를 알지 못하는 분들은 부처님께서 제행무상, 무아를 얘기를 하니까 그냥 허무적인 무아, 무상으로 해석합니다. 이 세상 태어나 죽고 나면 끝나버린다고 여깁니다. 만약에 그런 도리라면 부처님께서 무아 대해 고구정녕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순간순간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무실체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변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고, 또다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뀌어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 마음이 바뀌어가고 있는 겁니다. 바뀐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다시 태어나는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현재심을 가장 잘 다스리는 것이 간화선

 

 찰나생 찰나멸 하는 이 마음을 참선하는 화두와 결부시켜야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한 생각으로 집중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잠시라도 오랫동안 삼매에 들지 못할지라도 잠시라도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어서 다른 망상이 없을 때가 있을 겁니다. 그 순간이 과거심과 미래심과 현재심 중에 이 현재심도 불가득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이 현재심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이 현재심 하나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행법이 나왔다고 봅니다. 제가 처음 주장자 들어 보일 때 소리 쳤을 때 보고 듣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심입니다. 순간 드러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느 수행보다 화두를 드는 수행이 좋다라고 하는 이유가 저는 이 현재심에 있다고 봅니다. 내 의심이 불붙어서 생생했을 때 과거도 미래도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현재심에만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초기 교설에 보면 항상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위파사나 수행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몸 동작을 관하고, 우리의 느낌을 관하고, 일체 대상을 두고 일어나는 법처를 관하고, 우리 마음 심행처를 관하는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초기 수행법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법이 바로 사념처관(四念處觀)라고 합니다. 여기에도 근본은 마지막 이 한 마음이라고 봅니다.
 화두가 가장 잘 되는 그 순간이 현재심을 가장 잘 다스리는 순간입니다. 현재심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나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 현재심, 여기에 집중되면 과거심 사라져 버렸으니 생각 없고, 미래심 오지 않았으니 떠올릴 필요 없으니, 과거 미래 다 끊어져 버리고 현재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스스로 지혜가 열립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위파사나와 간화선과의 혼란기입니다. 위파사나나 간화선이나 바로만 하면 다들 좋은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위파사나라는 말 자체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파사나는 남방불교에서 하고 있는 선법, 이것을 위파사나라고 대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위파사나라는 말에 담겨져 있는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원각경』에 보면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분명이 드러나 있습니다. 사마타와 위파사나, 사마타는 쉽게 우리말로 하면 정삼매입니다. 위파사나는 관조(觀照)입이다. 그래서 소위 관(觀) 그럽니다. 남방수행이 관법이기 때문에 위파사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마는 현재 위파사나라고 하는 말에 본래 담겨져 있는 뜻은 관조입니다.
 그래서 화두라는 것이 어느 수행법 보다 좋다고 하는 것은 화두 수행법은 의심에 사무쳤을 그 순간 현재심이 항상 새롭게 살아서 팔팔 움직이고 있기에 어느 수행법 보다도 힘차고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스님께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을 많이 쓰셨죠. 그런데 남방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행법에서 말하는 관과 화두에서 말하는 관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화두선에 말하는 관은 화두를 하고 있는 자기자신, 그 일심을, 거기에만 집중적으로 사무쳐서 삼매에 들어가면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겸해지는 그러한 경계이기 때문에 빨리 깨달을 수가 있다고 봅니다.
 순간순간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이 마음을 어떻게 잘 다스리느냐 거기에 중점이 있습니다. 법문을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해 봐야 합니다. 직접 해 보는 중에 경전을 보거나 어록을 보면 거기에 계합이 됩니다. 하는 것이 없으면 계합이 안 됩니다. 계합이 된다고 해서 거기에 자만심 갖기 말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참 주인공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조사 스님들이 말씀하신”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으라”는 시심마(是心?) 화두는 “너의 주인공이 무엇이냐” 하는 얘기와 같은 것입니다. 너희 참 주인공, 영원히 생사가 없는 나고 죽는 것에 상관없는 주인공을 찾으라 하니, 진짜 어디 생사에 상관없고 깨끗한 참 주인공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재가불자님들이나 초보 스님들 대개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그렇게 알았습니다. 이 현실 떠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그 무엇이 ‘참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니 이것을 찾아 깨달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렇게 알면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왜 무아(無我)를 말씀하셨습니까? 지금 나, ‘나’ 하는 나가 불변성 갖고 있는 변함없는 나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순간순간 태어나는 나를 가르쳐 주기 위해 연기법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현실을 떠나서 따로 알 수 없는, 우리가 찾아 깨달아야 할 어떤 ‘참 나’가 있고, 영원히 죽음과 상관없는, 극락세계 가서 영원히 행복 누리는 존재가 따로 있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말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정견(正見)을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순간 바로 드러나는 현재심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현실을 떠나서 따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연기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조사스님 법문을 보면 어느 초학자가 조실스님을 찾아가서 “스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좀 잘 가르쳐 주십시오.”하니까 조실스님이 초학자에게 여러 가지 묻습니다. 묻는대로 또박또박 대답을 잘 한단 말입니다.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더니 지금 다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한 마음, 네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로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묻고 네가 답하는 이것이 부처다’ 라는 그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부처다, 마음이 부처다”라고 합니다.
 이 뜻이 확연하게 드러난 게송이 있습니다. 쌍림부대사 송입니다. “우리가 밤에 잠잘 때 항상 같이 자고, 아침에 일어날 때 항상 같이 일어난다. 앉을 때 같이 앉고, 걸을 때 같이 걸어가고, 말할 때 같이 말하고, 묵묵할 때 같이 묵묵한다.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우리 몸의 그림자와 같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무엇이 하나 따로 있어서 항상 나를 따라 다니는데 우리는 잘 모른다, 이렇게 알기 쉽지요? 마지막 구절에 바로 드러내 놓았습니다. “만약 부처 간 곳을 알고자 할 진데, 지금 이 순간 말하고 듣는 요놈이다.”

 래서 제가 처음에 주장자를 들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적진에 나가서 적진과 싸우는 그러한 용감한 사람보다도 내 자신과 싸워서 나를 이길 수 있는 그 사람이 가장 용맹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견성 한 번 하면 그냥 편안하게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견성한 사람이라고 찰나생 찰나멸은 그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견성한 사람이라고 ‘마음’ 챙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찰나생 찰나멸’인데 그 때 다스려 챙기지 아니하면 번뇌망상에 끌려갑니다.

 래서 부처님께서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예의주시하며 관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화두 놓지 않고 항상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자신을 잘 관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둘로 보지 않습니다. 화두를 해도 그 도리를 알고 깨닫자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은 나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나의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을 용서할 줄 알고 이해할 줄 알고 남을 존경합니다.

 

 


* 우리가 아는 고정관념과 지식, 자만심, 아집은 늘 계곡에 흘려보내는 것이 좋다. 하나라도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고 머무는 순간, 향상일로는 종언을 고한다. 늘 강물처럼 흘러야지 하며 발원해 본다...

 


 

이 글은 보문사(서울 상도동, 주지 지범스님)에서 지난 3월 21일부터 7일간 성황리에 열린 ‘7인 선사 초청법회’에서 일오스님(3월 22일)의 법문을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7인의 선사에는 일오스님을 포함한 고우(각화사 선원장)ㆍ현산(화엄사 선원장)ㆍ혜국(남국선원 선원장)ㆍ무여(축서사 주지)ㆍ대원(학림사 조실)ㆍ혜정(법주사 회주)스님의 법석이 열렸습니다.

 

 

* 이글은 월간 <선문화> 2004년 5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출처 : 求道歷程(구도역정)
글쓴이 : 푸른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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