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지식을 찾아서 _ 화엄사 조실 도천 스님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12곳의 좋은 터 가운데 하나인 충남 금산 대둔산 태고사(太古寺, 주지 도천). 원효대사가 ‘도인이 날 땅’이라며 춤을 추었다는 길지(吉地)에 둥지를 튼 절이다. 2년 전 이맘때 두 달간의 구도여행 도중에 참배했던 태고사는 여전히 맑고 투명한 녹색 기운을 내뿜고 있다. 비 내린 뒤 더욱 웅장하게 다가오는 산세는 ‘대둔산의 도인’ 도천 큰스님의 모습처럼 범접하기 힘든 신령함을 간직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가 송시열(宋時烈ㆍ1607-1689) 선생이 쓴 ‘석문(石門)’이란 휘호가 새겨진 바위 일주문을 지나니, 큰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필자의 두 손을 잡고 “자나 깨나 ‘관세음보살’을 염하라”고 당부하며 염주를 손에 쥐어주시던 큰스님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진다.
절 아래서 보면, 태고사 뒤는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왼쪽 봉우리는 관음봉 또는 문수봉이라 불리는데, 이런 봉우리가 있는 절은 큰 도인들이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대못을 박았고, 도천 큰스님은 일일이 대못을 뽑았다. 절 뒤편 중앙에 있는 바위는 의상 대사가 올라가 춤췄다는 의상대이다. 절 앞쪽으로는 저 멀리 서대산 천자봉이 보이는데, 수많은 작은 산봉우리들이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되어 태고사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형상이다. 큰스님이 범종각을 절벽 위 바위 위에 지은 까닭은 종소리가 바위를 통해 퍼져나가 태고사를 둘러싸고 있는 대둔산의 잠든 용을 깨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 원주스님이 큰스님의 건강을 염려했던 말씀을 기억하며, 조실방에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마침 과로로 눈에 통증이 생겨 쉬고 계시던 큰스님은 반갑게 불청객을 맞이 하신다.
“큰스님, 2년만에 뵙겠습니다.”
“그래, 뭐하러 왔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큰스님 법문을 신문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왔습니다.”
“나는 암 것도 모르는 사람이여. 일밖에 몰라.”
큰스님은 “잠시 누워서 쉬겠다”며 양해를 구한 후 휴식을 취한다. 다행히 큰스님은 눈이 좀 불편한 것 외에는 아직도 정정하시다.
큰스님이 누워 계시자, 옆에서 모시던 한호응(70ㆍ대전 도마동) 거사가 평소 곁에서 듣고 본 이런 저런 말씀을 들려준다.
“요즘 큰스님은 13살에 출가해 금강산 마하연에서 은사 묵언 스님을 시봉하던 때를 자주 회상하시곤 합니다.”
어린 나이에 당돌하게도 도인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은 도천 스님이 13살 때 만난 ‘금강산 도인’이 바로 신묵언 스님이다. 스님은 15년 동안 수월 스님의 수제자인 묵언 스님을 시봉하며 그토록 간절히 얻고자 했던 도(道)를 닦았다. 어떤 대꾸라도 하면 벼락을 내릴 정도로 엄했던 스승을 모시고 수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낮에는 땔나무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고 숯불에 공양을 지었다. 물이 부족해 손을 씻지 못해서 갈라터질 때면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쌀이 부족해 끼니를 거르며 정진할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짚신을 신은 채 마하연에서 연화대까지 600미터 정도의 눈길을 혼자서 다 치워야 했다.
이런 수행담을 듣던 한거사가 어느 때 도천 스님께 질문했다.
“스님, 힘드시면 집에 가시지, 왜 그토록 시집살이를 하셨어요?”
“도(道) 하나 얻으려고….”
스님은 그 어떤 고행을 하더라도 도 닦는 본분사를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도 하나 얻으려고’ 오늘도 수많은 구도자들이 좌복이 닳도록 선방에 주리를 틀거나, 밤낮 없이 염불ㆍ주력하거나 절하며 정진하고 있다. 그러나 출가한 지 강산이 여덟 번이나 변하는 동안, 오로지 ‘도 하나 얻으려는’ 간절한 마음을 놓지 않고 있는 수행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내년이면 고금에 드문 백수(白壽; 99세)의 세랍에서 풍겨나오는 법력은 과연 ‘한국불교의 살아있는 전설’이란 수식어를 실감케 한다.
분단 이후 금강산에서 하산한 도천 스님은 울릉도를 빼고는 전국의 산하를 직접 걸어다니며 만행했다. 그러다 스님은 인연의 땅, 태고사를 만났다. 태고사는 금강산 마하연과 가장 유사한 곳이었고, 도인이 많이 나는 도량임을 직감했기에 평생 눌러앉은 것이다.
한거사와의 대화가 어느 정도 끝난 후, 큰스님은 법성행(69) 화주보살을 불러 도량 곳곳을 자세히 설명해 주라고 명하신다.
화주보살을 따라 나선 태고사 도량 곳곳은 불사가 진행중이다. 잠시도 안일과 편안함을 용납치 않는 큰스님은 올 11월 선방 완공을 목표로 노구를 이끌고 수시로 공사를 지도하신다. 대둔산 지맥(地脈)이 잘 흘러내린 선방에는 공부인들과 어르신들이 정진하게 된다. 큰스님은 선방과 더불어 경허-수월-묵언 선사를 모신 조사전과 개인 수행용 토굴도 더 지을 생각이다.
62년부터 일을 수행삼아 불사를 계속해 온 큰스님은 오늘날의 태고사를 이룩했지만, 한번도 나랏돈으로 법당을 지은 적이 없다. 국고보조금으로 절을 지으면 나라식으로 건물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고사는 철저히 금강산 마하연의 건축양식을 본따서 조성할 수 있었다.
큰스님이 얼마나 철저히 근검절약하며 노동수행을 해왔는지 알 수 있는 일화는 무수하다.
옛날 어려운 시절, 절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큰스님은 혼자서 얼마나 잘 먹고 사나’ 하고 몰래 엿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은 놀랍게도 솔잎가루와 물 한 모금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안 인부들은 “참 스님이시다”라며 더욱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훗날 택시기사가 된 한 인부가 전한 증언이다.
처음 태고사를 일굴 때,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 헤진 승복을 입고 대전까지 물건을 사러 간 큰스님은 너무나 배가 고파서 대전역전시장 자판에서 3원짜리 국수 한 그릇을 사 드신 일이 있었다. 이것이 당신을 위해 돈을 쓴 유일한 일이었지만, 큰스님은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셨다고 한다. 또 한번은 공양간의 수채 구멍에 밥 한 톨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걸 보신 큰스님이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너무나도 명백한 인과(因果)의 도리를 알기에 쌀 한 톨도 버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태고사에 정착하기 전, 아자방(亞字房: ‘亞’ 자 모양으로 방고래를 만들고 구들을 놓은 선방)이 있는 칠불사에서 정진할 때는 공양간에 쌀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때인가 쌀이 바닥 났을 때, 매일 단지에 공양 해먹을 만큼의 쌀이 저절로 채워지는 신비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검소하게, 스스로 ‘태고사의 머슴’이라 부르며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살아온 큰스님이지만,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심과 보살심은 더욱 스님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큰스님은 ‘업장 소멸만 하면 병도 물러간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셔요. 집에서 나름대로 정진한 신도들이 오면 먼저 아시고 자상한 법문을 해주지만, 욕심에 찌들어 법문을 해달라고 하면 입을 다물고 말죠. 수행이란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진정 하심이 될 때 비로소 준비가 되기 때문이죠.”
30년 전, 교직 생활을 하다가 척추를 다치고 유방암에 걸려 태고사에 찾아 온 법성행 보살은 하루 1000 배, 하루 관세음보살 정근 3만독을 한 후 어느새 병이 사라지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태고사에 찾아오는 불자들은 큰스님이 항상 일만 하시는 모습을 보고, 수행에는 관심이 없지 않은가 하고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법성행 보살처럼 태고사의 구참 신도들은 공부와 일, 지계행이 그대로 수행임을 잘 알고 있다. 큰스님은 수행자의 근기와 인연을 보고 그에 맞는 수행법을 지도한다는 것. 즉 ‘관세음보살’ 또는 ‘지장보살’ 정근, 천수다라니, 절하기, 참선 등 다양한 행법을 그때 그때마다 적절하게 일러준다. 보통 관음정근은 하루 3만독, 절은 하루 1천배, 천수 다라니는 하루 300독을 기준으로 한다. “매일 이렇게 쉬지 않고 정진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게 큰스님의 경험담이다.
큰스님은 불자들에게 관음정근이나 절하기를 주로 시키지만, 근기와 인연에 따라 ‘관세음보살이 누구인가?’나 ‘이뭣고?’를 찾는 참선을 권하기도 한다. 평생 새벽 1시면 일어나 참선하시는 큰스님은 기도, 참선, 간경, 주력 수행을 통해 일념을 이뤄 깨침으로 나아가도록 방편을 시설하고 계신 것이다.
공양시간이 끝난 후, 이번에는 ‘도천 큰스님의 분신’이라 불릴 정도로 정진에 열심인 상좌 정안 스님을 뵈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신도들로부터 “이 세상에 없는 효자스님”으로 칭송받는 정안 스님은 68년 10월 보름 입재 후 40년동안 기도정진을 멈추지 않은 놀라운 정진력을 보여주고 있다. 3년마다 1만일 기도결제를 하고 해제하는 바로 당일, 결제로 들어가기 때문에 태고사는 사시사철 기도정진이 끊어지지 않는 도량이다.
“1만일 기도정진이 끝날 때마다 점점 깊고 넓어지는 마음을 실감합니다. 삼생(三生; 과거, 현재, 미래)과 사생(四生; 태, 란, 습, 화로 태어난 생명) 육도(六道;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세계가 실재하지만, 그것 역시 마음 안의 세계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삼라만상은 중생의 업이 나타난 것입니다. 업따라 인연따라 펼쳐지는 생멸하는 삶은 ‘살아있는 꿈’이지요.”
“큰스님께 공부 점검을 자주 받으십니까?” 하고 여쭈니,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데 뭘 묻고 답할 게 따로 있나요” 라고 하신다. 그야말로 사제지간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엿볼 수 있는 자신있는 표현이다.
정안 스님의 정근시간은 아침 4~6시, 오전 9시반~12시반, 오후 2~4시, 저녁 6시반~저녁 8시반 등 하루 8시간. <천수경>과 <금강경> 독송, 지장보살 정근, 축원 등으로 진행되는 기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어진다.
67년 전남 담양군 금석면 보광사에서 큰스님을 처음 뵐 때를 스님은 이렇게 회상한다.
“옛날, 옛날, 옛날의 큰스님. 진짜, 진짜, 진짜 큰스님이란 느낌이 들었지요. 큰스님은 평생 천수다라니로 수행한 수월 큰스님의 가풍을 그대로 잇고 있습니다. 보살도와 일, 참선과 계행이 오롯이 하나인 수행입니다.”
큰스님은 ‘공부와 보살행과 계행 등 3가지 흐름속에서 도를 닦으라’는 의미의 ‘도천(道川)’이란 법명을 받았는데, 흥미롭게도 속명 역시 같은 이름이다. 평생 계행을 지키고 일하면서 참선하는 큰스님의 숨은 면모를 상좌스님의 설명을 통해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 근대 선종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은 수월 스님이 보름달이라면, 남방의 도인 혜월 스님은 반달이요, 덕숭총림을 세운 만공 스님은 초생달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깨달음의 깊이는 선문답을 능통하게 하고 설법을 잘 하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비’ 역시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요, 직접 관음보살이 되는 수 밖에 없다. 경허-수월-묵언 스님의 법맥을 이은 도천 큰스님의 가풍은 말없이 참선하며 보살도를 행하는 데 있음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마침, 선방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큰스님이 조실방에서 나오시자, 동행하며 다시 법문을 청했다.
“큰스님, 초파일을 맞아 불자들을 향해 법문 한 마디 해주십시오.”
“내가 왜 큰스님이야, 이 절 머슴이야.”
“큰스님, 한 마디라도 들려주십시오.”
“난 아는 게 없어. 일밖에 몰러.”
끝내 한 마디도 ‘아는 소리’를 하지 않는 일구(一句: 깨달음의 한 마디)에는 어떻게 잔머리를 굴려볼 방법이 없다. 마치 유마 거사의 ‘우뢰와 같은 침묵(一默如雷)’을 듣는 느낌이랄까.
큰스님은 결코 사족(蛇足)을 단 적이 없지만,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히 살면 그게 바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망상ㆍ분별 없는 평상심이 도이다)’의 수행이 되는 도리를 신도들에게 설한 적이 있다.
“그저 일에 집중해서 온 정성을 모두어 일해 봐. 탐진치 3독심이 눈녹듯 사라지고 온갖 번뇌를 여의는 것을 느끼게 된다구. 그러다보면 상(相)내는 마음이 사라져, 부지불식간에. 상을 버리는 것이 불교의 처음이요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내가 있다’는 헛된 집착이 ‘상’인데 그 상으로 3독심이 생기고 그 3독심으로 무수한 번뇌가 싹트는 거야. 그러니까 하심(下心)하는 것을 비굴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돼.”
큰스님이 공사를 지시하는 도중, 천성산 조계암 무문관에서 2년간 폐관(閉關) 정진을 하고 나온 한 수좌스님이 큰스님께 인사를 올리며 지도ㆍ점검을 부탁한다. 수좌와 함께 조실방으로 들어가시는 큰스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손을 잡으니, 큰스님께서 가만히 손을 꼬옥 잡아주신다. ‘불교 일 하더라도 정진을 놓치지 말라’는 말없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까마귀는 까마귀 소리를 내고, 까치는 까치 소리를 내지. 인간이 환골탈태(換骨奪胎) 하지 못하고 까치 소리를 내서는 안돼.”
언젠가 큰스님이 한거사에게 화두처럼 던진 질문이 다가온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면서 사람다운 소리를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살 것인가. 대둔산을 내려오면서 어느덧 이 질문이 화두가 되어 가슴에 박힌다.
현대불교신문=글 김성우 기자/사진 박재완 기자
도천 스님은
1910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13세에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월 스님의 제자인 신묵언 스님을 은사로 출가, 15년간 모시며 참선했다. 그후 20여년간 금강산 마하연, 신계사, 묘향산, 유점사, 법왕사 등에서 수행한 스님은 50년 한국전쟁 이후 남한으로 내려왔다. 범어사와 내원암, 칠불암, 해인사 선방을 거쳐 금강산과 산세가 가장 유사한 대둔산 태고사에 방부를 들이고 공양주 소임을 보았다. 1.4후퇴 때 태고사에 빨치산이 들어오자 묵언을 하고 7일 단식을 하다 마지막으로 태고사에서 나왔다. 전쟁 중에 건물 7동이 잿더미가 된 태고사로 돌아온 스님은 62년 움막을 하나 짓고 솔잎가루와 나물죽을 먹으며 46년간 두문불출하며 지금까지 불사를 겸한 노동수행(雲力)을 이어오고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百丈淸規)에 따라 늘 묵언하며 계행을 지키고 보살행을 실천해 온 스님은 ‘수월가풍(水月家風)’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현재 화엄사 조실 겸 태고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은 무수한 도인(道人)의 출현을 기약하며 태고사 중창불사에 심혈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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