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화두참구법 -무여스님-

희명화 2011. 11. 3. 08:55

 

[화두참구법 1] 간절히 또 간절히   (축서사 무여스님)

 

 


저를 따라해 주십시오.
마음도 아니요(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흔히 사람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우리들의 주인공이다 합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도 해요. 그러나 마음이라는 말은 맞지가 않아요. 그래서 그것을 한 물건이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육조 혜능대사께서는 남악회양선사가 오니까, "무슨 물건이 왔는고?" 하셨다는 거예요.

회양선사께서는 이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8년간이나 쩔쩔 매시다가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해서 육조스님의 適子가 되셨다고 합니다. 또 그것을 우리는 부처라 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이름이 부처일 따름이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소위 '이 뭣고'라는 화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뭣고'를 드시는 분은 '이뭣고'를 '마삼근'을 드시는 분은 마삼근을, 아니면 또 다른 화두를 드시는 분은 다른 화두를 꼬옥 타파하시기 바랍니다.
이 화두를 타파하시는 분은 삼천대천세계를 막 희롱하듯이 마음대로 遊泳하실 수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분은 생사윤회의 초탈을 넘지 못하고 늘 괴롭게, 어렵게 힘드시게 사실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부터 여섯 번,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참선은 어떻게 하는가? 화두 참선법에 대해 비교적 자상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 시간에 좀 발심을 하고 아주 신심을 내셔서 여러분의 일생에 아주 좋은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요즘 항간에 선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다고 해요. 제방의 선원이나 수행처에는 참선하러 오는 분들로 상당히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비슷한 그런 경향들이 많다는 것이예요. 유럽이나 미주에서는 선에 대한 붐 비슷하게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가하면 동남아 어떤 수행처에 가니까 서양에서 온 각 수행자들로서 북새통을 이루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중동이나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거의 각국에서 선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일종에 붐 비슷하게 되고 있답니다. 최근에는 웰빙바람으로 선에 대해서 더욱 고조가 되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거예요. 다른 종교이야기를 해서 좀 뭣합니다만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까지도 선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는거래요. 그래서 몇년전에는 로마교황께서 동양의 사제들이 동양적인 수행을 한다해서 대노하셨다는 그런 기사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왜 그러면 세계적으로 선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고조가 되고 있느냐?

한마디로 선을 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있다는거래요. 인류가 그간 산업화와 공업화로 물질적으로 상당히 성공해서 아파트도 좋은 아파트 짓고 상당히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가난했을 때는 돈만 벌어서 그렇게만 살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돈을 많이 벌고 물질의 풍요속에 소비가 미덕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게 되니까 가난했을때보다 오히려 더 괴롭고, 마음이 더 어두워지고, 불만스럽고, 그래서 사는 재미를 훨씬 더 못느낀다는 거래요.

선진국에서는 자살자가 많이 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아주 문제가 되고 있답니다. 왜냐? 그간 물질만 좀 많이 갖추면 그 속에 행복이 있는 줄 알았는데, 즉 물질자체가 행복자체였는데 물질을 갖추고 보니까 그것은 살아가는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닦아야 된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하는 겁니다. 그 마음을 닦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 바로 선인거래요.

한 십여년전에 돌아가신 인도의 유명한 수행자인 라즈니쉬는 "미래의 세계는 선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고 그래요. 최근에 첨단을 걷는 미래학자들 가운데는 "이 지구가 앞으로 좀 평화스럽고 좀 잘 살고, 좀 인간다운 그런 삶을 영위하려면 선이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요즘은 많답니다. 어쨌든 선에 대한 관심도 많고 미래지향적인 그런 인사들이 긍정적인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고 있습니다.

晩時之歎이지만 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이 하루에 십 분이나 삼십분씩만이라도 자기 수행을 한다면 아마 우리 지구촌이 살만한 좋은 곳이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 년전에 이것을 갈파했어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수행을 해야하고 수행하더라도 자기 불성을 깨쳐야 합니다. 즉 영원한 생명과 무한 능력을 계발해서 거기에 진정으로 느끼고 살아가지 않으면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오직 이 길뿐이다.'하셨어요.

삼대 성인 중에 한 분인 공자님께서는 도에 대해 이런 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여러분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朝聞道이면 夕死라도 可矣라.

아침에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그야말로 마지막이예요. 그 죽음도 아침에 도만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도는 그런것입니다. 성인의 그런 말씀에 따라서 그 이후에 무수한 사람들이 출가를 하고 도를 닦고 수행에 전념을 했어요.

우리 불교 선사들이나 조사들중에서는 대단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 선을 위해서 수행을 위해서 자기의 전부를 던졌어요. 그야말로 청춘을 불사르고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쳤어요. 그 유명한 분 중에 한 분이 二祖 혜가 스님의 斷臂(단비)입니다.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셨어요. 그 당시는 양나라 시대였어요. 武帝하고 이런 저런 불교에 대해서 좀 나누어 보니까 아직도 법을 펼만한 그런 시절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양자강을 건너서 숭산 소림굴로 잠적을 합니다. 그 소림굴에 들어간지 9년만에 어느날 "대사, 대사"하면서 "도를 닦으러 왔습니다,
도를 가르쳐주십시오" 하는 이가 있었어요. 달마대사께서는 소림굴안에서 한참 면벽을 하고 선정에 들어있는데 한 서너번을 그래도 뭐 꼼짝을 않는거래요.

손님이 오면 얼른 일어나서 '어서오십시오'하면서 반기는 것이 보통의 경우인데 달마대사께서는 조금도 움직임이 없이 꼼짝않는 거래요. 그 분이 누구냐? 그 분은 神光이라고 아주 똑똑하신 분입니다. 천재중의 천재래요. 학문적으로 배울것 다 배우고 더이상 배울것이 없어서 달마대사라는 분이 도가 높다고 하니까 내가 도를 닦아야겠다하고 불원천리하고 소림굴에 당도한거래요.

그런데 조금도 반기지도 않고 뒤도 안 돌아보는거래요. 그 분도 프라이드가 대단한 분이라 그냥 버티고 서있는 거래요. 마침 함박눈이 그냥 막 쏟아지는거래요. 그 눈을 다맞고 밤새도록 서있었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날이 뿌옇게 새는데도 그렇게 서있는 거래요. 그래도 달마대사는 꼼짝않고 면벽좌선하고 있었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날이 뿌옇게 새는데도 그렇게 서있는거래요. 그래도 달마대사는 꼼짝 않고 면벽좌선하고 있었어요. 그 때 또 "대사님, 대사님"하면서 도를 닦으러 왔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달마대사께서 뒤를 돌아보더니 이 道는 보통 道가 아니다. 네가 참으로 도를 닦으려면 증표를 대라, 뭐 표시가 있어야 네 마음을 알수가 있지, 말로 닦을 수는 없는 道다 하는거래요.

마침 저만치에 칼이 있었어요. 그 칼을 가지고 와서는 자기의 팔을 뚝 자르고 나서는 그 팔을 바치는거예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영화나 드라마나 무슨 연극 아니면 또 소설류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보기도 했을텐데 아마 그런 장면은 본 적은 없을겁니다.

저도 이 절에 와서 한 삼년째 되는 해에 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삼일이나 고민을 했어요. 진짜일까? 針小棒大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런 저런 별 생각을 다했어요. 그러고 나서 마지막 날 "틀림없을 거야! 그럴 수 있어"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이런 이야기는 좀 어렵지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팔을 잘라서 척! 바칠 수 있는 그렇지 않으면 몸의 일부를 막 태워서 구도를 할정도로 그렇게 자기를 던지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조금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이 법이래요.

이런 이야기는 지금은 잘 이해가 안될거래요. 화두가 좀 잘되어서 몽중일여, 꿈속에서도 아주 여여한 그런 상태가 되면 '그럴 수 있겠다.' 나도 때로는 그러한 마음을 낼 수 있겠다.' 그런 생각까지도 낼 수가 있습니다.

"이 공부는 어떤 공부보다도 殊勝하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쳐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도 좋은 공부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해라 해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안 하면 자기 손해라는 거래요. 어쨌든 인생의 진정한 행복, 참 행복은 道에서만 느낄 수 있다, 수행에서만 느낄 수 있다, 그 수행에서 인생의 행복을 못 느끼면 반쪽 인생도 못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나서 第一聲이 뭐냐? 첫 마디가 아! 기특하구나, 일체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구나 했어요. 모든 중생이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소나 돼지나 저 심지어 땅속의 지렁이 같은 아주 미물까지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다고 했어요. 부처님은 아주 천재적인 분이예요. 천재 중에 천재래요. 그 초롱초롱한 지혜, 그 천재적인 지혜를 여러분도 다 가졌다는 거예요. 경전에 보면 부처님 대단한 분이구나 이런분도 있구나 이런 양반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동하시는 것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또 누가 질문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지혜의 말씀을 그대로 설파하시는 거예요.

대단한 지혜를 가진 분이 부처님이래요. 그런 천재적인 지혜를 여러분도 다 가졌다는 거예요. 그 천재적인 지혜만 가진 것이 아니라 복덕도 대단하게 具足한 분이래요. 여기 우리 상단에는 공양물을 안 올렸을텐 데, 큰 법회에 가면 꼭 공양물을 올립니다. 공양물을 어떤 절이든 어떤 법회든 다 올리는 것을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공양물을 어떤 절에서도 받아 드실정도로 그렇게 복덕을 구족한 분이래요. 보통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그와 같이 얻어 먹기가 어려운 것인데, 그런 분이 바로 부처님이래요.
즉 부처님과 같은 천재성과 그 복덕까지도 다 구족한,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어떤 분도 다 갖추었다는 거래요.

그래서 수행을 할 분은 기본적으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나도 깨칠 수가 있다 나도 부처님과 같은 그런 대단한 복덕과 지혜를 갖출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열반경이나 법화경에서는 일체중생이 皆有佛性이다.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 즉 일체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거래요. 그래서 흔히 본래는 부처다. 본 바탕은 부처와 똑같다는 거래요. 그런 생각을 누구나 꼭 하시길 바랍니다. 수행은 그러한 바탕에서 그런 출발을 해야합니다.

세상의 모든 구함은 바깥에서 구해요. 돈도 밖에서 벌고 명예나 권세나 그 어떤 것도 밖에서 구하고 밖에서 얻습니다. 그런데 수행은 내 자신에게서 얻어요. 내 자신에게서 느끼는 것 내 자신에게서 보는 거래요. 그래서 수행은 내가 얼마나 발심했느냐? 얼마나 마음으로 참으로 냈느냐에 따라서 아주 쉬울 수도 있어요. 그런가하면 발심하지 못하면 참으로 큰 마음을 못내면 어렵고 어려운 일이 수행이예요.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나도 이 공부를 참으로 하면 나도 깨칠 수 있다. 그런 그 마음을 확신하면서 그래서 이 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본래는 다 그렇게 다 부처가 되고 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부처님처럼 완전한 인격체, 그야말로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왜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못 되느냐?

번뇌망상때문에 그런거래요.

 

 





***티끌만큼의 분별도 버리고
이 문에 들어라***


 


    축서사 선원장 무 여 스님(2004)

    축서사 선원장 무여 스님은 지난 12월 19일 서울 불광사에서 열린
    불광 30주년 기념 법회에 모인 1천 여명의 재가불자들에게 ‘쉬면 곧 깨닫는다’
    는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이날 재가불자들에게 “수행을 통해 얻는 기쁨이
    곧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
    이라며 “마음을 철저히 비우고
    철저히 쉬라”
    고 강조했다. 법문을 요약 게재한다.

    천재적인 문장가이자 크게 깨침을 얻으신 ‘소동파’라는 분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부처의 설법인데, 저 푸른 산이 어찌 법신부처의
    몸이 아니랴(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라고 했습니다.
    어제까지는 시끄럽고 듣기 싫은 물소리인데 깨치고 나니까 부처님 말씀처럼
    들리며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묘한 자연의 모습이 바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만고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도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있으며 여러분이 사랑하는
    가족과 오손도손하게 살고 있는 집이 진정한 불국토(佛國土)라는 것입니다.
    이 법계(法界)의 모든 것이 바로 부처요, 부처님의 법문이고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뜻입니다.
    그것은 물을 마신사람만이 물의 도움을 알듯이 깨달은 사람만이 오직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깨달은 사람의 공상에서는
    오직 극락세계요, 바로 정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치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괴로움과 고통의 세계, 암흑의 세계 일
    뿐입니다.

    흔히 미망중생 미혹중생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어둡고 탁한 중생이라는 뜻인데
    그렇기 때문에 중생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가 어려워 늘 불안하고 괴롭고
    못 살겠다, 죽겠다며 헐떡거리는 것이 중생계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생도 누구나 다 불성은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반경』에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중생이라 함은 사람뿐 아니라 개, 소, 돼지부터 저 땅속에 있는 미물까지
    일체의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법화경』에는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성불도(皆成佛道)라’ 했습니다.
    곧 그런 일체의 중생이 모두 다 성불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무주거상이라는 분이 말씀하시길 ‘도는 몸으로 토해하는 것이 아니며
    법은 몸으로 깨달아 증득(證得)하는 것이 아니다’
    라며 오직 한가하게 아무것도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하루 24시간 도(道) 아닌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본래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그대로 원만해서 무구무정(無垢無淨)이라고 합니다.
    닦는 것도 아니고 증득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승천대사께서 쓰신 신심명(信心銘) 첫 대목에‘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지극한 도(道)란 곧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揀擇)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인데 즉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망상 피우지 말라는 뜻으로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 이 사람은 사랑하고
    저 사람은 싫어하는 그런 분별심(分別心), 그 마음만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티끌만큼도 사랑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갖지 마라.
    사유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하셨습니다.

    선종사찰에 들어가다가 보면 일주문에 ‘입차문래 막존지혜(入此門來 莫存智慧)라’
    는 글을 써 붙인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지혜를 갖지 말라’, 즉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분별심, 망상을 피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망상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아는 것을 몽땅 버리고 철저히
    비워야 하는 공부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쉬면 곧 깨닫는다’ 했습니다. 쉬면 바로 깨닫는다,
    그래서 쉬고 쉬고 또 쉬고 쉬었어요. 쉬고 있다는 생각까지도 쉬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무업대달(無業大達)이라는 선사는 젊은 스님들이 “스님, 법문 좀
    해주십시오.” 하면 “야, 이놈들아 법문, 법문하지 말고 망상이나 피우지 마라”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즉 법문도 망상이라는 이야기인데 부처자리에서 보면 그것도 없어야 될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일체 망상이 다 사라진 그 상태가 진정한 법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상만 없어지면 바로 부처경계(佛境界)인 것입니다.

    그 마음을 쉬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수행입니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주력,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는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극락까지는 못가시더라도 선정, 염불 삼매에는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맑아서 묘한 법력(法力)을 느끼는 정도는 꼭 체험하십시오.
    무심경지에 들어가면 아주 무심한 일체 번뇌망상이 전혀 없는 아주 고요하고
    고요한 그런 경지가 바로 부처님의 경지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공부가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고 꼭 해야 되는 공부가 바로 이 공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깐해서는 어렵습니다.
    늘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다보면 참으로 될 날이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을 많이 갖춘 사람이라고 해도 수행은 꼭 해야
    합니다. 팔만사천법문도 수행에 비하면 안내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치려면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 속에서 극락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행복을 꼭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정리=안문옥 기자

    무여 스님은…

    194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스님은 세속 나이 26살 때 공(空) 사상에
    매료돼 출가 결심해,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동화사, 송광사, 해인사, 망월사, 칠불사 등 전국 선원에서 30여년
    동안 수선안거 했으며 칠불사와 망월사 선원장, 조계종 기초선원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행자시절부터 ‘이뭐꼬’ 화두를 참구한 스님은 지난 1987년부터
    경북 봉화 축서사에 주석하며 수많은 운수납자를 제접하고 있다.
    수행자의 기본 덕목으로 ‘발심과 신심과 계행청정’을 꼽는 스님은
    언제나 불자들에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수행에서 느낄 수 있다”며
    그 경험을 꼭 체험해 보기를 당부했다.


    -법보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