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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스님이 법당에 나아가 문하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금속으로 된 부처는 용광로 속에서 녹아버리고, 나무로 된 부처는 불 속에서 타버리며, 진흙으로 된 부처는 물속에서 녹아버린다. 참 부처는 내 안에 앉아 있다. 보리ㆍ열반ㆍ진여ㆍ불성 등은 모두 몸에 입은 옷과 같은 것들이다. 또한 이것들은 번뇌가 될 뿐이다.
질문이 없으면 번뇌도 없다. 실제리지(實際理地) 따위가 어디에 붙어있겠는가. 한 마음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것[萬法]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다만 법리를 규명하면서 좌선하는 일만 2~30년 하라. 그래도 만일 해득할 수 없다면 내 목을 잘라가라.
꿈이나 허깨비, 공중의 꽃 같은 것을 잡으려 하는 것은 헛된 고생을 하는 것이다. 마음도 또한 다르지 않고 만법도 또한 그러하다. 이미 밖에서 얻는 것에 쫓아가지 않는다면 다시 무엇에 사로잡히겠는가. 저 양처럼 함부로 물건을 주워 입 속에 넣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師上堂 示衆云 金佛不度爐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眞佛內裡坐 菩提涅槃眞如佛性 盡是貼體衣服 亦名煩惱 不問卽無煩惱 實際理地什麽處著 一心不生萬法無咎 但究理而坐二三十年 若不會截取老僧頭去 夢幻空花徒勞把捉 心若不異萬法亦如 旣不從外得 更拘什麽 如羊相似 更亂拾物安口中作麽
이 상당법문은 조주 선사의 진면목을 들어낸 것이라 상당히 중요한 법문이다. 철불ㆍ목불ㆍ니불(泥佛)은 진짜 부처가 아니다. 그런 형상은 나약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세워놓은 방편일 뿐이다. '참 부처는 내 속에 앉아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이 한마디에서 즉시 깨달아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 부처를 외부에서 찾았던가. 반성해야 한다. 부처는 '마음이 부처'이다.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다.
열반ㆍ진여ㆍ불성 등은 겉을 치장하기 위한 옷과 같은 것일 뿐 허망한 용어들이다. 중생이 곧 부처인데 이런 용어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이런 용어에 얽매어있으면 번뇌만 치성할 뿐이다. 열반을 얻지 않아도, 진여를 체득하지 않아도, 불성이 드러나지 않아도 중생 그 자체가 이미 부처이다. 이것은 사자 새끼가 비록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낸다고 하여도 운명적으로 이미 백수의 왕인 사자인 것과 같다.
마음속에 질문이 없으면 번뇌는 사라진다. 중생이 이미 부처인데, 다시 무슨 질문이 일어날 것인가? 나의 근원은 원래 청정하다. 나의 바탕은 청정하고 허공과 같아서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는데 무슨 질문이 있겠는가. 다만 마음을 쉬어라. 한 마음이라도 일어나면 만 가지에 허물이 일어나지만,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으면 만 가지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다만 이치를 탐구하면서 '마음이 부처'인 것을 깨달으라. 그리고 난 다음 20년이고 30년이고 좌선하며 마음을 쉬어가다 보면 어느 날 저절로 진(眞)과 일치된 자신을 발견하리라.
마음은 몸이 만든 허망한 그림자와 같다. 만약 몸이 없으면 마음도 또한 사라진다. 마음이 임시 주인이라 하지만 마음은 허망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만든 각종 의미와 가치가 어찌 허망하지 않겠는가? 길다, 짧다, 더럽다, 깨끗하다, 옳다, 그르다, 부귀, 빈천 등 이런 개념들은 모두 꿈속의 허깨비와 같고, 허공의 꽃과 같은 것들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잡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그것은 허공에다 헛되이 손질하는 것과 같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설사 무엇인가 얻어 쥐었다하여도 허망한 것들일 뿐이다.
이 법문의 요점은 '참 부처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라는 말이다. 또한 경전에서 나오는 열반ㆍ진여ㆍ불성 등의 일체 언어의 뜻에 유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약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세워놓은 언어들이다. 만일 중생이 이 언어들의 뜻에 의하여서 일단 위급함을 모면하였으면 다음으로는 참다운 부처님의 진리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참 진리를 터득하는 것은 무엇이 불이고, 무엇이 법이고, 무엇이 승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먼저 법리(法理)를 궁구하여야 한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참 부처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20년이고 30년이고 좌선하면서 무심으로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내 속의 부처가 스스로 일체에 대하여 달통하게 되고 스스로 부처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이 법문은 선학(禪學)을 연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두고두고 되짚어 보아야 할 법문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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