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스님 초청법회 /2005년 8월
지난 21일 쌍문동의 공생선원(02-900-2248)에서는 고우스님의
법회가 열렸다. 주제는 ‘재가자의 참선수행법’.
현재 한국 참선계의 정신적인 지주로 통하는 고우 스님은
수행에 대한 사부대중의 갈증에 명명백백한 답변을 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박한 지식과 체험에서 우러나온 명쾌한
설법은 재가자들의 수행 길잡이가 된다. 따라서 이번 호에는
고우스님의 설법을 통해 한국정통 불교수행의 대중화에 대한
지침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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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가 한국불교의 전통입니다.
그렇다면 선불교는 어떤 가르침이며, 우리 삶과 어떤 연관이 있으며
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요.
훌륭한 법당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불교 정신을 함양하고
보급도 중요합니다. 또 그 가르침이 일상생활에서 도움도 줘야 하구요.
불교의 생활화는 참 중요합니다.
틈만 나면 불자님들에게 이 점을 강조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어도 조금이나마 도움 드릴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가 부족해도 듣는 분이 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선은 뭐냐. 사실 이 질문은 우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선입니다. 우리 자신이 선이다 그 말이예요.
그러니 선을 말하겠다고, 또 듣겠다고 이러는 건 사실
고운 살결을 긁어 부스럼을 내는 거 같다 이런 이야깁니다.
무슨 이야기냐.
내가 중국 선종 사찰만 대략 70-80여 곳을 배낭여행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왠만한 선사 유적지 다 돌아본 셈이지요.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불교가 완전 실종됐습니다.
일본불교는 선불교를 사량분별해 이치나 이론을 따져 말합니다.
선이 학설로 전락한 게지요. 불교 원형이 전통으로 남아 있는 건
한국 뿐이라는 말입니다. 우린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선불교가 도대체 뭐냐.
한마디로 말해 우리 개개인이 선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부처님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도 깨닫기 전에는 뭔가 깨달을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깨달을게 따로 있는게 아니라 이미 모든게
다 완성돼 있더라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다 위대한 존재인데 그걸 모르고 하잘것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존재니 위대한 삶을 살자. 이게 선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위대하다는 걸 못보느냐. 왜 하잘것없는 삶 사는가.
사실 직업별로는 정치인 중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권력 그것 잡으려고 야단입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소위 지도자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는 제 노릇을 제대로 하는 어른이
없다 이겁니다. 어른이 없기는 종교계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보기엔 이런 악순환이 개선될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이걸 고쳐나가지 않으면 이 사회가 건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선의 역할이나 사명감을
무척 필요로 하고 있으나 사실 승가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습니다.
나 스스로도 반성할 문젭니다. 선을 함께 이야기하며 우리가 얼마나
하찮게 살고 있는가를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원래 생긴 존재대로만 살면 평화롭고 자유로운 좋은 사회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위대한 인간이 왜 하찮게 사느냐.
정치가 엉망이라서, 경제가 흔들려서, 사회가 불안해서 못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지엽적인 겁니다. 근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존재 원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존재 원리을 아는 것,
이것만 풀리면 다 풀립니다.
이걸 풀어낸 불교는 그래서 도깨비 방망이보다 더 신통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존재 원리를, 자신이 위대하다는 걸 못보나.
우리가 겉만 보기에 그렇습니다. 자기도 타인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합니다. 요즘 애들이 말하는 얼짱 몸짱이 바로 겉만 본 것입니다.
이 겉모습을 '나'라 생각하고 집착한다 이런 말입니다.
겉모습에만 집착하면 이기심이 일어납니다.
부모자식 부부 사이도 이해관계로만 바라보게 됩니다.
요새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도 다 이런 탓입니다.
겉만 보고 '나'라 하는 것 말입니다. 겉만 보면 남과 자꾸 비교하게
됩니다. 앞집 차는 그랜저인데 우리는 왜 티코냐.
우리 집은 몇평인데 뭐가 어떠니 저떠니 하고 떠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남 탓만 합니다. 이런 맘을 내는 바로 그 순간,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걸 모릅니다.
자기를 학대하는 그 마음은 곧바로 옆사람에게 확산됩니다.
오늘 불자 여러분은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가세요.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 그 방법을 부처님께서 일러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선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를 학대하고 나아가 남을 학대하면 갈등밖에
더 있습니까.
그럼 부처님은 겉모습 아닌 뭘 보셨느냐. 바로 반야심경 핵심
네 글자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
정신 몸뚱이 그게 모두 공이라는 말입니다.
절에 다니며 반야심경을 수백번도 독송하셨지요.
모든 게 공하다는 걸 아십니까. 어째서 모든 게 공입니까.
지금 우리가 분명히 듣고 보고 만지고 하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불교가 좀 어려워집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조금이라도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면 좋겠습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이 공을 증명합니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면 분자와 원자로 나뉩니다. 이걸 또 쪼개면 핵이 나오고
또 쪼개면 쿼크가 됩니다. 이 쿼크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줍니다.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물질 어디에서도 이웃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제 홀로 독립적인 인자는
발견 못했습니다. 즉 공하다는 겁니다.
지금 과학 선진국에서는 힉스입자를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입자는 우주공간의 기운이나 질량을 이루는 기본 입자라는 가설입니다.
수 킬로미터 되는 입자 가속기로 이 입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5년후에는 힉스입자가 증명되리라 합니다.
입자와 기운이 결합되어 있음을 밝히는 게지요.
이것도 결국 이 세상에 단일 독립 물체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겁니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건 공하다는 이야기지요.
이해하기 쉽게 짚을 예로 들어보지요.
짚으로는 가마니 새끼 덕석등을 만듭니다. 다 그 재료는 짚입니다.
결국은 다 같은 것이지요. 가마니 새끼 덕석 이런 건 본질에 있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짚을 못보고 만들어진 물건만 보고
서로 가마니가 좋다,덕석이 좋다,이게좋다, 저게 좋다 다툽니다.
분열 대립합니다.
부처님은 이 짚을 보신 겝니다. 이 짚을 못보니 갈등 푸는 것도
힘으로만 하려 합니다. 미국 대통령 부시를 보십시오.
부시가 나빠서가 아니라 겉만 보니 그렇게 푸는 법 밖에 몰라 그런 겁니다.
부모자식, 부부도 힘으로만 풀려 합니다.
가족도 힘으로 풀려한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인생살이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가 문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지가 문제입니다.
공입니다. 이 세상에는 저 홀로 존재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연기(緣起)로서 존재합니다.
연기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얘깁니다. 형상 있는 것이나,
형상 없는 것이나 다 연기로서만 존재합니다.
이 법당 안에 모든 존재가 다 연기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를 아홉가지로 나눕니다.
태란습화등등 들어 보셨죠. 이처럼 다양하게 존재해도 다 연기로
존재합니다. 이것과 저것이 결합되어야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생명까지도 그렇습니다. 예를 또 들어보지요.
큰 바다가 있습니다. 잔잔한 바다에 바람이 붑니다.
파도 일어납니다.
수천수만 파도가 일지만 똑같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 파도를 불경에서는 법성이라 부릅니다.
이 법성이 모인 우주 삼라만상을 법계라 하지요.
파도마다 다 물이 있습니다.
저 산 짐승 사람 하나하나에 다 물, 즉 법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파도를 구성하는 그 물은 바다와 다른 물입니까.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바다의 물, 파도의 물 그걸 자성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이 원리를 발견하고는 사람도 귀천 장애 학력등등
모든 걸 넘어, 겉모습 아닌 차원에서 보면, 즉 모든 걸 물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조금도 차별없이 하나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는 그걸 못보니.
자성자리 법성자리는 차별없이 하나입니다.
뱁새와 황새는 다리 길이가 다릅니다.
겉만 보면 서로 잘났다 좋다 나쁘다로 갈등합니다.
그러나 모든 자성이 물이고 짚이고 공인줄 알면 삼라만상이 같은
것입니다. 갈등 대립 없어집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겉만 보고 이기심을 내면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오온개공, 즉 물은 똑같은 물이라는 걸 알면 어떤 맘이 일어나느냐.
경험 안하면 모릅니다. 상대에게 뭘 바라기보다는 고마움이 먼저 일고,
나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하고 그런 맘이 듭니다.
나만 좋으려는 맘 말고 .
분열된 의식이 통합된 의식으로 승화되고 눈이 열립니다.
크게 전체를 보는 눈. 불교에서 보면 모든 이가 왕입니다.
개인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에게 끝없이 요구하는 것,
이게 부끄럽기 시작합니다.
서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런 맘이 확대돼 사회전체가 불국토가 됩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 재미와 보람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돈 때문에만 일한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직장인 80%가 불행한 직장생활을 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는 자기 생각 잘못에서 기인합니다.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면 일이 재미있어집니다.
재미 있으니 열심히 하게 됩니다. 열심히 하니 전문가가 됩니다.
그러니 자연 돈과 명예가 따라 옵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건,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좋은 인격이 형성된다는 사실입니다. 돈만 보고들 일하니까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게 된 겁니다. 어른이 어른 구실을 못하니 젊은이들에게
무시당합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다 내가 만든 것입니다.
오온개공을 알면 모든 잘못된 생각이 하루아침에 고쳐집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선에 대해 봅시다.
모든 게 공하고 연기로서만 존재한다는 존재원리를 설명했습니다.
참선은 오온개공을 체험하는 게 참선입니다.
우리 존재 원리가 선입니다. 이걸 체험하면 선을 한 것입니다.
겉만 보고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이걸 안믿으면 내일부터 법당 올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 피해 또한 큽니다.
존재에 대한 무지. 이것만 깨트리면 안 풀릴 일 없습니다.
남북 문제도 그러합니다. 물질적 도움만 준다고 뭐가 됩니까.
그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이 있는 한 절대 안됩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연기이기에 개공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중국의 문필가 임어당이나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는 불교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불교는 비관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모든 게 공하다는 개공, 어렵긴 합니다다. 그러나 공은 허망이 아닙니다.
오늘같이 구름이 꽉 낀 하늘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구름이란 원래 공한 것입니다. 공은 이 먹구름입니다.
먹구름이 공인 줄 알면 다 안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옵니다.
구름만 없어진다면 허망할지 모르지만, 구름이 걷히면 자동적으로 해가
비칩니다. 구름이 없는 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없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착각을 없애면, 구름이 걷히고 해가 저절로 비칩니다.
우리 일상이 대부분 착각이다 라고 말한다 해서 허망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착각만 없애면 기쁨이 절로 생깁니다. 원래 모든 게 없다는 걸
아는 걸 적적(寂寂)이라 하고, 해가 나오는 걸 성성(惺惺)이라 합니다.
이 둘은 분리되는 게 아니라 같은 걸 다르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적적을 알면 곧 성성이요, 성성을 알면 적적임을 알게 됩니다.
이걸 체험 하는 걸 선이라 부릅니다.
이걸 알려면 간화선에 대해 조금 아셔야 합니다. 달마 1조부터
5조까지는 간화선과 조금 다릅니다. 초조부터 5조까지는 공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적적을 먼저 이야기 한다는 말입니다.
6조 혜능대사부터는 진짜 간화선입니다. 6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악도 없다. 선악도 없으면 절대 선으로 간다. 대장부가 된다.
그때 너 본래 모습이 뭐냐. 깨달아라. 그 어떤 것도 이분법적으로 생각마라.
이분법적 사고를 파쇄하는 게 선이다"
구름 걷기가 아니라 해를 먼저 이야기 합니다. 해가 보입니다.
조사들이 어려운 선문답들, 거기엔 한없는 자비심이 담겨 잇습니다.
다 깨어지고 나면 본래 면목이 나오는 법입니다.
불성이니 자성이니 하는 것도 다 이름일 뿐입니다. 이름만 갖고는
뭘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물건인지 의심하다가 깨닫는 것입니다.
상근기는 의심 과정없이 즉석에서 그대로 깨닫지만 하근기는 의심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공부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순간순간이라도 진정으로 의심하는 습관을 지니십시오.
폼이 아닙니다. 참선은 시간과 장소 폼에 상관없이 늘 '이뭣고'를 지니고
사는 삶입니다. 오온개공입니다. 겉만 보지 말고 진면목을 보려는
자세입니다. 화두는 의심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깨치라고 준 것입니다.
남 의식 안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참선을 하든 안하든,
출가를 했든 안했든 우리나라 현재 불교계를 보며 가장 맘 아픈 건
수행과 생활이 따로 논다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스님이 인기가 많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나도 만나 봤지만, 이 분들의 법문은 인과법문입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왜 착한 이가 고난을 받나'라는 근본 질문에 이들은
'착한 이는 결국 천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산다'는 인과법문을 합니다.
대승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승 최초 경전이 반야심경입니다.
여기서는 부처님 법문의 핵심중의 핵심인 오온개공을 이야기합니다.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봉사를 하든 이 공이 기본입니다.
내가 있고 오온개공이란 어불성설입니다.
공을 말하면서 아상을 놓지 못하는 건 동으로 가면서 서로 간다고
우기는 아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게 한국 불교 현실입니다.
한국 선불교는 인과법문보다 더 심오한 법문입니다.
틱낫한이나 달라이 라마는 달을 가리키는 방편인 손가락을 말하는
불교입니다. 그 분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그 불교는 그런 불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불교는 손가락 불교에도 못미치는 세속 불교가
너무 많습니다. 손가락 불교만 해도 낫겠습니다.
대부분 수행과 생활이 따로 노는 세속 불교이니 이 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오온개공을 아는 정견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선불교는 그럼 뭘 믿나. 오온개공 연기법, 이것 뿐입니다.
헛된 믿음은 자기 시간만 아니라 다른 이 시간까지 낭비하게 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이런 세속불교는 한국뿐입니다.
말로는 오만가지 좋은 말들을 늘여놓지만, 실제는 엉망입니다.
이런 불교 하려면 아예 하지 마십시오.
지옥에는 신앙인들의 몸만 잔뜩 있고, 천당에는 혀만 가득 있더라는
우스개 소리가 전혀 빈말은 아닙니다.
중노릇 45년을 사심 아닌 공심 이야기로 일관했습니다.
내가 소장이던 시절 조계종에는 '사상이 좋다'는 말이 있엇습니다.
이젠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매사 공심으로 공심으로 살아가는 걸 말합니다.
우린 정말 보배를 두고도 보밴 줄 모르고 살아가니 안타깝습니다.
인류가 뭘 제대로 바꿔 보겠다고 겉만 붙잡고 몇천년을 시험했지만
근본 문제는 여전히 묘연합니다. 존재에 대한 무지, 이것 때문에
인류 역사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제 서양은 동양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서양은 아직도 제도 수단등을 바꾸는 것으로 공심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동양은 존재 원리에 입각해 진심으로 해왔습니다.
겉말고 진짜, 각자 자신에게서 이걸 확인합시다.
실천이 아직 잘 안되면 이해라도 하고 삽시다. 그것만 해도 삶이 달라집니다.
그걸 알면 인생이 너무 즐겁습니다. 모르면 인생이 지겹기만 합니다.
사는 게 즐거우니 맘 속 지꺼기도 정화됩니다. 오온개공. 중도연기.
이겁니다.
부처님 뭐라 하셨는지 알아야 삶에 도움이 됩니다. 내가 기거하던
경북 영주에 식당을 운영하는 한 보살님이 계셧습니다.
정견이 있으면 삶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 보살님께 하루는 식당 일을 하면서 도닦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스님, 그런 것도 있습니까.
"예. 이제부터는 식당손님이 들어오면 겉만 보지 말고 돈으로도 보지 말고
은인으로 보십시오. 제대로 보면 모든 이가 은인입니다.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살면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돈도 많이 벌릴 겁니다. 은인. 사람을 수단으로 말고 은인으로 대하십시오"
그 보살이 한 달 후 환한 얼굴로 장사 정말 잘 된다고 말을 하더군요.
불교 이치를 실천한 거죠. 얼핏 손해보는 짓 같아도 절대 손해 안봅니다.
수행은 고행이 아닙니다. 이 이치만 알면 얼마나 줄겁게 수행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깨달음은 이보다 더 즐거운 것입니다. 재미와 보람이 한껏 있습니다.
왜 저리 좀스럽게들 살고 있는지 하는 생각도 들 겝니다.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입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운 맘이 일어납니다.
법문 예정 시간이 좀 지났군요. 내 별명이 '고(GO)-법문 한 번 했다
하면 세시간'인데.(웃음)
부처님 법은 위대한 법입니다. 하나님 브라만 알라는 모두 창조를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만이 물리학과 일치하는 진실법을 말씁하셨습니다.
부처가 부처가 아니니 부처입니다. 부처님만이 이걸 아셨습니다.
금강경 보십시오. 부처가 부처가 아니니 부처인 것입니다.
불교를 믿기만 아니 이해만 해도 달라집니다.
우리 사회 가정을 이리 만들자는 원력으로 사십시오. 이게 불교입니다.
다 제도하고도 한사람도 제도한 적이 없다고 하는 것,
이런 '마음 항복받기'를 하는 게 부처님 제자입니다.
깨닫고 보니 본래 그런 것인데 내가 따로 제도하고 말고 한 게 뭐있나.
혼자 하지 말고 더불어 합시다. 그런 수행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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