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자가 밀라래빠에게 여쭈었다.
스승이시여, 남을 위하여 조그만 선행이라도 행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밀라래빠는 대답하였다.
만약에 이기심이 조금도 없이 이런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집착이 조금도 없는 행위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남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서는 자신을 위해서 살기도 어렵다.
남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같이 물에 빠진 다른 사람들을 구해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진리의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을 구해 주려고 지나치게 안달해서는 안 된다.
하늘이 계속되는 한 중생의 수는 끝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제도할 중생은
그대가 완전한 진리를 깨달아
흔들림 없는 땅에 바로 선 뒤에도 무수히 많다.
나는 그대들 모두에게 때가 올 때까지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매진하겠다고 하는
단 하나의 원을 세우도록 당부한다.
낮아지고 겸손하여라.
그리고 그대의 몸을 값비싼 옷으로 장식하지 말라.
보잘 것 없는 음식과 보잘 것 없는 옷으로 만족하여라.
세속적인 명예를 구하지 말라.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번뇌에 좌우되지 말라.
그리고 반드시 체험을 통해서 지혜를 얻도록 하라.
마지막으로 진리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이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실천하도록 하여라.
밀라래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위대한 역경사 마르빠님(*1)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미를 드리니
스승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지 못하고
단지 공경만 하는 이들은 완전한 은총을 받지 못하리.
진리에 바르게 입문하지 못하면
경전의 말씀이 눈을 멀게 하리라.
체험으로 경전 말씀이 확인되지 않으면
그대의 수행은 엇길로 나아가리.
바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지 않으면
세속을 떠나도 고통만 더하리.
욕심과 무지를 극복치 않는 자는
설법을 행하여도 빈 울림이리라.
정도와 정법을 알지 못한 이는
수행에 열중해도 잘못된 길 걷게 되네.
공덕을 행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하는 이에게
윤회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네.
진리를 위해 자신의 마음속에 쌓아둔 것을 버리지 않는 이는
아무리 명상해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리.
자신 속에 자족하지 않는 이는
아무리 쌓아도 남의 것이 된다네.
마음의 평화의 내적인 대광명(大光明) 얻지 못하면
세상의 편안함과 즐거움은 고통의 근원이네.
욕망의 마귀를 극복치 않으면
명예욕이 다툼과 파멸로 이끄리라.
쾌락을 구하는 마음은 다섯 가지 악을 부추기고
이익을 구하는 마음은 친구를 멀게 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은 남에게 원망을 받으리라.
평정심을 지니면 남과 다툼이 없어지고
부동심을 지니면 어지러운 마음 사라지리.
완전한 고독 속에 영원한 친구 있고
가장 낮은 자리에 가장 높은 자리 있고
서두르지 않는 곳에 가장 빠른 길이 있고
온갖 목적 버리는데 가장 순수한 목적 있다네.*
은밀한 길 걷다보면 지름길이 생기고
공의 진리를 깨달으면 자비가 생기네.
나와 남의 분별이 녹으면 남을 도울 수 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들을 돕는다면, 본래의 나를 만나리라.
본래의 나를 만난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의 경지이다.
이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모든 불성을 지닌 이들에게, 그리고 나의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니,
그대들은 이 사실을 간절히 구할지니, 이것저것 구별 않기를..
-히말라야의 성자 미라래빠 / 에반스 웬츠 저
[蛇足]
에반스 웬츠가 쓴 영문번역이다 보니, 문구가 딱딱하여 의미가 잘 통하도록 문구를 수정했다. 요즘 서양에서도 깨달음을 위하여 여기저기서 마음을 전하고 영적 지도자들이 많다. 밀라래빠의 전기를 읽어보면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대개의 맛집도 그렇지만, 아무리 원조의 흉내를 내서 모방을 하더라도 원조를 따라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최근 서양의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달콤한 말로 깨달음을 설파하고 있지만, 동양의 위대한 선사들의 깊이가 있는 말씀의 맛까지는 흉내 내기가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이 글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온갖 목적 버리는데 가장 순수한 목적 있다네."라는 구절이다. 반야심경에서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라고 하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 깨달음은 얻을 바 없는 것을 얻는 것이다. 깨달았다는 상(相)마저 비우는 것이니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에는 깨달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뉴 에이지 계열의 영적 지도자들의 책들을 읽어보면 참 달콤하고 위안을 준다. 누구나 책을 읽고 나면 자신이 이해하고 느낀 것만으로도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에크하르트 톨레가 늘 하는 말에 보면, “이미 그대는 깨달음의 자리에 있다. 때문에 깨달음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일시적인 진통제의 역할은 할 수 있어도 근원적인 처방은 되지 않는다. 단지 달콤한 아편성분의 말일 뿐이다.
톨레의 책을 내려놓고 삶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이것저것 부딪치는 일에 고통과 많은 좌절을 느낀다고 하는 분들이 꽤 많다. 그것도 비록 뭔가 책을 읽고 뭔가 나름대로 얻었다고 하는 분들도 하는 말이다. 경전에서는 이런 일을 일러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과 같다고 했다. 잔잔한 미풍이 불 때는 돌이 도움이 되지만, 큰 바람이 오거나 태풍이 온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체험은 공부의 시작일 뿐이다. 체험은 얼음이 언 강 위에 단지 볕이 든 것일 뿐이다. 얼음이 녹듯이, 자신을 완전히 비우지 못한다면, 결국 둘이 없는 불이(non-duality)의 세상은 구경도 못하고 삶을 마쳐야 하니, 결국 완전한 깨달음이란 말은 꿈속에서 당첨된 로또와 다르지 않다. 곧 꿈을 깰 때 즈음이면, 허망함을 알지니 그때는 너무 늦지 않겠는가?
* 1. 역경사 마르빠 - 경전을 번역하는 사람을 역경사라고 하며 마르빠는 밀라래빠의 스승이다. 마르빠의 스승은 틸로빠이고, 틸로빠의 스승은 나로빠이다. 즉 나로빠 -틸로빠 - 마르빠 - 밀라래빠의 계보로 이어진다. 나로빠가 지은 마하무드라의 노래가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마하무드라의 노래는 제자인 틸로빠를 위하여 스승 나로빠가 지은 깨달음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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