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스크랩] *원오 스님의 ‘벽암록’ / 공안선(公案禪)

희명화 2013. 3. 21. 02:02

 

원오 스님의 ‘벽암록’

 

 

깨달음, 기존세계 깨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벽암록을 읽으면 모든 알음알이가 딱 끊어진다.”

성철 스님의 말씀이다. 세상에 우리를 좌절시키는 책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벽암록’은 아주 낯선 방식으로 우리를 좌절시킨다. 난해하거나 심오하거나 전문적이어서 어려운 거라면 이런저런 지식을 총동원해서라도 어떻게 해보련만, ‘벽암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것저것 끌어다가 이해 비슷한 거라도 좀 해보려 해도, 이해는 고사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만다. 모래사막 한복판에서 아무런 무기도 갖지 못한 채 검을 든 적과 마주친 느낌이랄까. 지략이고 기술이고 통할 리가 없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방법은 하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맨몸뚱이로 맞서는 수밖에! ‘벽암록’을 읽기 위해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찢기고 넘어지고 흠씬 두들겨 맞을 각오를, 아니 기꺼이 죽을 각오까지도 해야 한다.

 

 

▲ 원오 스님이 벽암록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진 협산사의 벽암정과 벽암천.

 

 

●조사들이 툭 던지는 언행 화두 삼다

‘벽암록’은 화두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는,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공안집(公安集)이다. 부처님의 교설에 근거한 실천을 추구하는 여래선(如來禪)이나 좌선과 명상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묵조선(黙照禪)과 달리, 간화선은 일상에서 조사들이 던지는 말이나 행동을 붙들어 깨달음을 체득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니까 ‘화두공부’란 조사들이 무심한 듯 툭 던지는 언행들을 화두로 삼아 간단(間斷)없이 궁구하는 수행을 말한다.

‘간화’란 ‘화두를 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화두를 든다’고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화두를 생각한다.’고 하지 않고 ‘본다’거나 ‘든다’고 한다.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보려면’, 혹은 무언가를 ‘들고’ 가려면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놓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두는 방심하는 순간을 틈타 바로 비집고 들어오는 온갖 견해와 상념들을 쳐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벽암록’은 우리에게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지식을 내려놓을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인식을 다지고 확장시키는 대신 해체시키고 부숴버린다. 화두를 들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표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합리/비합리, 삶/죽음, 유/무, 선/악 등의 이분법으로 ‘간택(揀擇)’하려 해서는 안 된다.

화두는 어떤 논리와 지식으로도 뚫을 수 없고, 어떤 견해와 상식으로도 오를 수 없다. 글자 그대로 은산철벽(銀山鐵壁)! 돌파하기 어려운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비우겠다고 비워지는 마음도 아니려니와, 사실 비워야 할 마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을 돌파하고, 어떤 문턱을 넘어서려면 자신을 은산철벽으로 밀어붙어야 한다. 기존의 앎이 해체되고, 모든 인식이 무장해제되는 그 지점까지! 그 순간 이뤄지는 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느끼게 된다. 깨-달음. 기존의 세계를 깨지 않으면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벽암록’은 더없이 생생하게 전해준다.

“무릇 묻는 것은 복잡할 것이 없다. 그대들이 밖으로는 산하대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안으로도 견문각지가 있다고 여기거나, 위로는 우리가 도달해야만 하는 부처님의 경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래로는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일랑 모두 토해 버려라. 그래야지만 하루종일 행주좌와하는 가운데 한결같아지리라. 그러하면 비록 한 터럭 끝이라도 대천사계(大千沙界)만큼이나 넓으며, 확탕, 노탄 지옥에 있어도 안락국토에 있는 듯하며, 온갖 보배 속에 있어도 초라한 띠풀집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제25칙 ‘평창’)

 


●통념과 상식을 부수는 선문답

어떤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동산 스님이 말하였다. 

“삼 세 근이다.”

(제12칙 ‘본칙’)

‘벽암록’에 나오는 유명한 선문답이다. ‘문답’이라고는 하나, 사실 선문답에서는 물음과 답이 대응하지 않는다. 선승은 엉뚱해 보이는 답을 통해 제자의 물음을 깨거나,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제자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니까 선문답의 목적은 물음에 답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물음과 답의 전제 자체를 부수는 데 있다.

예컨대, ‘무엇이 부처인가.’라는 질문은 ‘부처’의 실체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 물음에 답하려는 일체의 시도 역시 부처의 실체를 가정할 수밖에 없다. 선문답은 만물의 ‘실체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문/답의 대칭성을 깨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인식의 일방향성을 비틀어 버린다. ‘벽암록’의 스승들은 제자에게 대답 대신 더 큰 질문을 되돌려 준다.

 

정 상좌가 임제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멱살을 잡고서 한 차례 뺨따귀를 후려치고 대뜸 밀쳐버렸다. 정 상좌가 우두커니 서 있자 곁에 있던 스님이 말하였다.

“정상좌야, 왜 절을 올리지 않느냐?”

 

정 상좌가 절을 하려다가 홀연히 크게 깨쳤다.

(제32칙 ‘본칙’)

임제 스님처럼 ‘과격한’ 스님들은 말로 안 되겠다 싶으면 이처럼 종종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喝·할] 몽둥이질[棒·방]을 하는 등의 폭력행위(?)를 불사하기도 한다. 물론 아무 때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는 건 아니고, 한 번의 가격(加擊)으로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자들에게나 사용하는 방편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면 알 속의 병아리는 안에서 껍질을 쪼고, 동시에 어미닭은 밖에서 껍질을 쪼아야 한다는 뜻의 줄탁동시(啐啄同時)란 스승과 제자의 이런 비대칭적 상호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이처럼 선문답은 서로가 공통의 전제 위에서 주고받는 아름다운 소통이 아니라, 상대의 인식지반을 깨고 통념과 상식을 부수는 역동적 사건이다.

‘벽암록’에서 ‘궁극적 진리’나 ‘보편적 선’ 같은 걸 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헛수고다. ‘벽암록’은 절대적 진리도, 보편적 선(善)도, 진리를 추구하는 나까지도 모두 부정한다.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세계를 언어표상으로 의미화하고 실체화하려는 일체의 사고를 부정하고, 오로지 구체적이고 생생한 깨달음의 현장만을 남겨놓는다. ‘벽암록’을 읽는 내내 우리는 기존의 언어와 인식이 일거에 무너지는, 다소 두렵지만 꽤 스릴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나의 세계가 깨지는 경험이라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보다 더 역동적인 부정의 세계를 나는 알지 못한다. ‘벽암록’은 내가 믿고 있는 것뿐 아니라 사유하는 나 자신까지도 부정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불온하고 혁명적인 텍스트다.

 

조주선사의 화두 ‘끽다거(喫茶去)’

 

‘벽암록’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는 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 스님이 설두산의 자성사에 머물면서 옛 조사들의 고칙(古則) 100개를 정리하고 여기에 송을 붙여 만든 ‘설두송고’다.

 

‘벽암록’은 송대에 원오극근(1063~1135) 스님이 ‘설두송고’를 바탕으로 수행자에게 제창하기 위해 만든 어록으로, 설두 스님의 본칙과 송에 원오 스님의 수시, 평창, 착어가 더해져 1125년에 완성되었다.

원오 스님은 중국 후난성 창더에 있는 협산사에서 ‘벽암록’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벽암천의 온천수를 길어와 그 위에 찻잎을 띄워 마셨다고 한다.

스님이 일본인 제자에게 남겨주었다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도 있지만, 차와 관련된 유명한 화두는 뭐니뭐니해도 조주선사의 ‘끽다거(喫茶去)’ 화두다.

절에 와본 적이 있다는 학인에게도, 와본 적이 없다는 학인에게도, 조주가 한 말은 “차 마시게.”였다.

학인들이 돌아간 후 “어째서 와보았다 해도 차나 마시라 하고, 와본 적이 없다 해도 차나 마시라고 하십니까?”라고 묻는 원주(院主)에게도 조주 스님은 말한다.

“자네도 차나 마시게!”

조주 스님은 시종일관 그저 ‘차 마시게.’라는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누구나 매일 마시는 차로써 수월하게 종지를 전하는 방식에 세파의 인연을 귀찮다 하지 않고 유연하게 따르는 조주의 비결이 나타난다.

조주가 학인들의 전력을 가리지 않고 권한 뜻과 일치해야 조주가 정성껏 올린 한 잔의 차 맛을 진실로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김영욱, ‘화두를 만나다’)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우리 같은 범인으로서는, 차나 한잔 하고 ‘벽암록’을 펴드는 수밖에!

 

채운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서울신문·수유+너머 공동기획

 

 

 

공안선(公案禪)-1

 

공안 의미 공부해서 선의 진리 깨닫는 선

원오 ‘벽암록’이 공안선 절정 이룬 완결판

 

‘공안(公案)’이란 부처님과 역대 조사 선지식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 기연(機緣, 동기 계기)이나 오도(悟道) 인연, 또는 선문답을 가리킨다. 고인(古人, 옛 선승)의 말씀은 불변의 법칙이라는 뜻에서 고칙(古則)이라고도 하는데, 송초(宋初)에 이르러 조사, 선사들이 이것(고칙 공안)을 참선수행자들에게 참구 과제로 수시(垂示, 提示/제시)하여 공부하게 함으로써 공안선이 형성되었다.

 

공안선(公案禪)은 공안의 의미를 공부(참구)함으로써 선(禪)의 진리를 깨닫는 선이다. 공안의 어의(語義)는 ‘공부(公府, 官府)의 안독(案牘, 즉 판결문)’에서 ‘공(公)’과 ‘안(案)’ 두 글자를 따서 만든 합성어로, 상부(上府)의 ‘공문’, ‘법령’, ‘규칙’, ‘관부(官府, 법원)의 판례(判例)’ 등을 가리키는 행정, 법률용어이다.

 

그러나 원래 자의(字意)는 재판관이 공적(公的)으로 안건을 심리할 때 쓰던 큰 책상(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법률용어가 되었고 이어 선종으로 들어와 선문답이나 조사·선지식들이 깨닫게 된 오도기연(悟道機緣)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인데, 마치 국가 공무원이 상부(上府)의 공문이나 법령, 판례 등을 준거(準據), 준칙(準則)으로 삼아야 하는 것처럼, 공안 역시 참선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는 하나의 규범, 모범문제, 준칙(準則)이 되기 때문이다.

 

공안의 바탕이 되는 오도기연과 선문답은 대부분 당대(唐代)에 형성되었지만, 공안선의 시작 즉 그것을 공안이라고 칭하여 공부, 참구하기 시작한 것은 송초라고 할 수 있다.

 

송초 즉 북송에 이르러 시문학의 발전과 함께 선승들은 고칙 공안에 대하여, 송고(頌古, 고칙 공안의 의미를 간결한 게송으로 표현하는 것), 염고(拈古, 고칙에 대한 시적인 촌평), 대어(代語, 고칙에 대하여 타인을 대신하여 평함), 별어(別語, 고칙에 대하여 별도로 말함), 착어(着語, 공안에 대한 촌평) 등의 형식으로 그 의미를 에둘러 표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繞路說禪), 그 효시는 임제 의현의 5대 법손인 분양 선소(汾陽善昭, 947∼1024)였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1004년) ‘전등록’에서 오도기연 100개를 뽑아 송고(頌古), 염고(拈古), 대어, 별어를 붙여서 ‘송고대별삼백칙(頌古代別三百則)’을 편찬, 저술했다.

 

이어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의 3대 법손인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은 다시 ‘전등록’에서 100칙을 뽑아 게송을 붙여 ‘설두송고백칙’을 편찬, 저술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던 설두 중현의 ‘설두송고백칙’은 분양 선소의 송고를 훨씬 뛰어넘는 시적(詩的)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송고백칙’은 바야흐로 공안선 시대, 문자선 시대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팡파르였다.

 

그 뒤를 이어서 공안선의 극치인 원오 극근(1063∼1135)의 ‘벽암록’이 나오고, 굉지 정각의 ‘종용록’과 대혜 종고의 ‘정법안장(正法眼藏)’, 그리고 송대의 마지막 공안집 ‘무문관’과 ‘허당록(虛堂錄)’이 잇달아 나왔는데, 특히 원오의 ‘벽암록’은 공안선의 절정을 이룬 완결판이었다.

 

이시설선(以詩說禪, 시로써 선을 표현함), 선(禪)과 시(詩)가 결합하여 북송의 선불교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공안선은, 그러나 ‘벽암록’을 정점으로 막을 내리고 남송시대 간화선 탄생의 단초를 제공한다.

 

공안선과 간화선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경향이 많은데 그것은 또한 공안과 화두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윤창화

그러나 근래에는 공안선과 간화선을 구분해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 역시 공안과 화두는 구분하고자 하는 입장인데, 선문답의 전체 단락(이야기)은 공안이고, 그 가운데 ‘무’, ‘간시궐’, ‘정전백수자’ 등 스승의 답어나 핵심구는 화두로 분리하여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호해서 혼란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공안선(公案禪)-2

 

공안은 선문답 속 의미 파악하는데 집중

화두는 번뇌망념 퇴치 위한 무기로 사용

 

공안의 어의는 이미 전회(前回)에서 설명했지만, 국가의 공문서, 법령, 법원의 판례 등을 뜻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제정한 법령, 공문서는 누구나 준수해야 하는 것처럼, 참선수행자도 공안을 참구해야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공안이라고 한 것이다.

 

공안(公案)이란 선의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참구(공부)의 과제로 제시하는 문제이다. 일심(一心)으로 매달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라고 제시해 주는 숙제인데, 숙제가 직접적인 문제가 아니라, ‘요로설선(繞路說禪, 에둘러 선을 설함)’ 즉 격언(格言)이나 우언(寓言), 또는 중국의 사자성어(四字成語)와 같이 에둘러서 알아차리게 하는 방법이다.

 

공안은 뚫어야 하는 과제, 해결해야 하는 과제, 숙제라고 하는 의미에서 화두(話頭)와 같은 것이지만―지금까지는 대체로 같은 것으로 보아왔음― 그러나 그 쓰임새는 다르다. 따라서 공안과 화두는 달리 보아야 한다.

 

무자 화두를 예로 들어 보고자 한다. 어떤 승(僧)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무(無, 없다).” “일체중생에게는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다는 것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개는 업식성(業識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趙州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一切衆生, 皆有佛性. 狗子為甚麼卻無. 州云, 為伊有業識性在).”

 

이상의 선문답 가운데 처음서부터 끝까지, 전체 단락은 공안이다. 그리고 공안 가운데 선사의 답어 즉 의문의 대상, 참구(탐구)의 대상이 되는 ‘무(無)’ 한 글자가 화두이다. 여러 선어록에서 그 용례나 쓰임새를 보면 공안은 선문답 전체를 가리키고 있는 반면, 화두는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한 자(字)나 한 구(句)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간시궐’, ‘마삼근’, ‘동산수상행’, ‘정전백수자’ 등도 모두 공안(선문답) 가운데 선사의 답어나 핵심어이다.

 

공안 가운데 선사의 답어를 뽑아서 화두로 참구하게 한 것은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 종고(1089∼1163)이다. 따라서 간화선은 공안선에서 발전했다고 보아야 하고 참구 방법도 거의 같지만, 그 차이점은 공안은 주로 선문답 속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화두는 의미 파악보다는 번뇌 망념을 퇴치하기 위한 무기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명한 공안집인 ‘벽암록’의 편찬자 원오 극근(1063∼1135)은 “납자들이 공안의 어의(語義, 의미)를 파악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라고 하여 공안을 참구하는 방법은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선승들이 게송(頌古)으로 공안의 의미에 대하여 읊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 종고는 “무(無)’는 유무(有無)의 무도 아니고, 허무의 무도 또 무에 무슨 도리(이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량분별하지 말고 문자로도 파악하려고 하지 말고 오로지 ‘무(無)’자에만 매달리라”고 말하고 있다. 일심으로 무자만 들고 있으라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우면 정신이 거기에 집중되어서 번뇌 망상이 퇴치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화두보다 내용이 긴 공안을 ‘무’, ‘간시궐’, ‘정전백수자’ 등 1~5자로 단축, 간소화시켜 보다 간편하게 참구할 수 있도록 하게 한 것이 간화선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윤창화

공안선은 공안의 의미 파악을 통하여 지혜를 기르는 것을 중시했고, 간화선은 화두 참구를 통하여 먼저 번뇌 망상을 제압한 다음 지혜를 기르게 한 것이다. 거의 같으면서도 초점은 좀 다르다. 그 밖에 공안은 참선자의 공부를 점검하는 학인접득(學人接得)의 방법으로 쓰였다.

 

/ 법보신문

출처 : 까치
글쓴이 : 희작(喜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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