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스크랩] 무비 큰스님 서장 27강 녹취 <中道偈>

희명화 2013. 3. 17. 13:42
 

                      27강


  <초전법륜경>이라고 하는 것이 최초로 설해진 경經일 것이다. 그게 거의 중의와 묵거 졌다고 봅니다. 거기서 과연 오비구에게 왜 갔겠는가? 그건 내 해석이예요. 오비구에게 왜 갔느냐? 어쨌든 처음에 오비구에게 갔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죠. 거기 가서 최초로 한 이야기가 뭐였느냐?

 

이게 <초전법륜경>이 최초의 경이라고 보는 겁니다.  중도中道 선언이야. 나는 중도를 깨달았다. 五비구가 6년 동안 지켜주느라, 부왕이 출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태자 지키라고 다섯 명을 억지로 딸려 보냈거든요. 그런데 이게 앞뒤가 뒤바뀌어 그 사람들 생각에 태자는 타락하고 자기들은 오히려 올곧은 수행자가 되어 수행을 하는 것으로 되었잖습니까? 최소한도 끝에 가서는. 사실은 싯달타 태자가 먼저 깨닫고 이 사람들은 싯달타 태자와 이별하고 녹야원에 와서 수행한다고 앉아있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여러 날 지난 후에 멀리서 싯달타 태자가 오거든요. 자기들을 찾아오거든.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끼리 “우리 아는 척 하지 말자. 인간 취급도 하지 말자. 자기를 위해서 따라 출가했는데 우릴 배신하고 저렇게 타락한 사람이니 아는 척도 하지 말자.” 라고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올수록 뭔가 모를 힘에 끌려서 전부 일어나지 않습니까? 외면하고 있다가 전부 일어나서 저절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다섯 명이 똑같이 싯달타 태자에게 예배를 올리고 아주 다소곳이 그야말로 순한 양이 되어 예배를 올리고 앉게 되는 감동적인 장면이 눈에 선하시죠?


그래서 최초의 설법이 녹야원에서 있게 되었는데 “왜 왔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이 없어요. 물론 함께 공부하던 사람이니까 인연이 깊다보니 그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왔다. 물론 제도라고 표현해도 좋은데 “나는 오해를 풀기 위해 왔다.” 그래요. 6년간 동고동락同苦同樂, 거기에 낙樂은 없죠. 6년간 피나는 고행을 함께 하다가 최후에 배신감을 느끼고 갔다는 거죠. 석가모니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가슴 속에 누가 제일 많이 남아있겠어요? 야수다라겠어요? 라후라겠어요? 야수다라도 아니고, 라후라도 아니야. 6년간 피나게 고행한 그 친구들이야. 게다가 그 사람들이 떠날 때 큰 오해를, 배신감을 품고 갔거든.  그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주는 게 제일 급한 일이야. 그래서 그 사람들을 찾아간 거야. 그리고 그 부다가야에서 깨달았지만 배다라스라는 그 도시는 그 때나 지금이나 아니 그 전부터 종교의 도시라. 수많은 종교가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마찬가지고. 인도 전역에서 뭔가  명상을 통해서나 무엇을 통해서나 자기들 나름대로  눈을 떴다고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거기 와서 시험을 받아야 돼. 거기서 수많은 선지식들과 부딪혀서 인정을 받아야 돼.  정말 제대로 깨달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인도 사회에서 행세를 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그런 것도 시험할 겸 간 거야. 어쨌든 급한 일이 그 사람들 오해를 풀기 위해 갔는데, 오해라는 게 말하자면 고행을 하지 않았다, 고행을 버렸다는 오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중도中道를 이야기한 이유도 거기 있어요. 물론 깨달은 것이 중도이고, 시종일관 중도를 이야기했지만, 최초의 <초전법륜경>에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 는 말을 처음에 했거든요. 중도를 이야기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 그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구요. 왜냐? 태자의 생활에서 최고의 향락을 누리고 살았거든. 그리고는 6년간 정반대의 피나는 고행을 했단 말이야. 그러면 쾌락의 생활도, 고행의 생활도 다 사람이 갈 바른 길은 아니다. 정상적인 길은 아니다. 그러니 고행도 벗어나고, 고행도 아니고, 말하자면 향락도 아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게. 그러니까 무슨 향락주의나 허무주의 그 어느 것 하나도 아니다. 물론 그런 것을 다 이해를 하고 포용은 하지만 어느 것도 아니다 라는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당신들이 믿고 있는 고행이 최고의 삶이 아니다. 그 오해, 거기서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갔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두말할 것도 없고, 조사스님들의 어록들을 보면 <서장>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대개 중도 이야기가 상당히 많고 또 <신심명>이라든지 <육조단경>이라든지 <증도가>라든지 그 외 수많은 어록들이 대개 중도를 많이 비치고 있어요. ‘중도’ 라는 낱말을 굳이 쓰는 이도 있지만, 안쓰는 사람들도 많으면서 내용은 거의 중도 이야기라.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이라고 하는 것은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 아미타불 후신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법안종의 선지식이거든요. 오종선 중에서 법안종法眼宗의 선지식인데 아미타불의 후신이라고도 하고, 염불종念佛宗의 중흥조 내지 염불종을 창시한 염불종에서도 상당히 추앙을 받는 스님입니다. 이 분이 후대 사람이죠.

저술이 아주 대단히 많아요. <종경록宗鏡錄> 100권이 있고, 이 100권을 압축하면 <만선동귀집>이라고 하는 6권의 책으로 압축됩니다. 내가 <만선동귀집> 6권을 읽고 참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요걸 또 압축하면 <유심결唯心訣>이라고 하는 작은 신수장경으로 네 페이지밖에 안 되는 저술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 분의 저술이 많기는 한데 <종경록> 100권을 6권으로 축약했다, 내 나름으로는 그렇게 보는데 그리고 6권의 <만선동귀집>에서 게송이 21개니까  구句가 44구절로서 축약을 했다고 봅니다. 물론 저의 판단인데  그래서 만선동귀중도선이라, 만선은 전부 중도로 돌아가는 함께 중도로 돌아가는 게송이다. <만선동귀집>이라고 하는 이름과 아울러서 제 나름대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열환화공구, 중간 앞면 중간에 있죠. 이 중도 이야기할 때 의례히 중도 공식이 있어요. 공식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뭣하지만 흔히 선방에서 중도 공식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는 ‘차’자로 읽어요. 이 자, 막을 차.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 그 다음에 중도정견中道正見, 이게 처음에 올라가야 되는데. 아까 팔정도 八正道에서 정견도 사실은  중도정견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중도 정견에 대한 공식을 흔히 쌍차쌍조 차조동시. 쌍이라고 하는 것은 둘을 뜻하는 거죠. 둘은 저기서 상대적인 것을 말합니다. 有다, 無다 이런 것에서부터 상대적인 것을 <육조단경>에서도 36대라해서 나열되어있고,  <신심명>에도  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간택. 단막증애但莫憎愛 증애, 쌍이죠? 그래서 쌍이라고 그래요. 단막증애면 통연명백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신심명>에도 죽 펼쳐지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상대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상대적으로 이루어진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게 불교의 과제라구요.


결론은 중도정견으로 이해해야 된다.

 왜 그렇게 이해해야 되느냐? 중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 실상 그대로 바르게 봐야 된다. 正見, 바르게 봐야 된다. 여기의 이 컵은 물 마시는데 고마운 컵이지만, 나를 공격하는 적이 있다면 이 컵이 무기로 化해야 되는 거야. 당연히. 모든 것은 그렇게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다고 이걸 늘 무기로 써도 안돼죠. 늘 무기로 쓰면 어떻게 되겠어요? 말도 아닌 거야. 때로는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무기로도 쓰고, 때로는 연필꽂이도 되고. 때로는 다른 음식도 담을 수 있고. 모든 사물들이 그렇게 존재합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사건도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늘 생각이 다르지. 어떤 사실을 두고서도 늘 견해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야. 그래서 쌍차雙遮라고 하는 것은 부정하는 것. 이것은 컵도 아니요 무기도 아니라는 것이 쌍차야.  그럼 쌍조雙照라고 하는 것은 컵도 되고 무기도 된다고 하는 것을 照라고 해요. ‘비칠 조’자. 遮는 반대, 부정하는 것이고. 그럼 차와 조를 동시에 수용해야 되는 거야. 이건 무기로도 또는 컵으로 동시에 수용해야 돼. 그렇게 알고 있어야 돼.


 남자가 늘 남자 노릇만 하나요? 여자가 늘 여자 노릇만 하나? 여자가 남자일할 수도 있고, 남자가 여자일 할 수도 있고. “뭣이 남자가....” 이러면 요즘 대접 못 받는 사회 아닙니까? 여자가 또 옛날에 생각했던 남자 노릇을 얼마나 훌륭히 잘 합니까? 편견으로 치우쳐 있으면 그건 아니예요. 그렇게 치우쳐 있도록 세상은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도정견으로 보라는 거죠. 그래서 차조동시遮照同時하라는 거죠. 부정과 긍정을. 부정은 유, 무. 거기서 부정과 긍정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고 그런 상대적인 것을 부정도 하고, 상대적인 것을 긍정도 하는,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다 수용하는. 또 모든 존재의 실상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해야 된다.

 옛날 현수스님 같은 분도 중도 공식 이야기를 많이 하고, 그 뒤에 조사스님들도 중도 공식을 많이 이야기 했어요. 그것이 중도 정견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지난 시간에 언급을 좀 했는데 좀 살펴보겠습니다. 간단하게 기본적인 중도 공식만을 말씀드렸습니다.


                        中道偈



菩提無發而發   佛道無求故求    妙用無行而行    眞智無作而作

보리무발이발   불도무구고구    묘용무행이행    진지무작이작


興悲悟其同體   行慈深入無緣    無所捨而行檀    無所持而具戒

흥비오기동체   행자심입무연    무소사이행단    무소지이구계


修進了無所起   習忍達無所傷    般若悟境無生    禪定知心無住

수진료무소기   습인달무소상    반야오경무생    선정지심무주


鑒無身而具相   證無說而談詮    建立水月道場    莊嚴性空世界

감무신이구상   증무설이담전    건립수월도량    장엄성공세계


羅列幻化供具   供養影響如來    懺悔罪性本空    勸請法身常住

나열환화공구   공양영향여래    참회죄성본공    권청법신상주


廻向了無所得   隨喜福等眞如    讚歎彼我虛玄    發願能所平等

회향료무소득   수희복등진여    찬탄피아허현    발원능소평등


禮拜影現法會   行道足躡虛空    焚香妙達無生    誦經深通實相

예배영현법회   행도족섭허공    분향묘달무생    송경심통실상


散華顯諸無著   彈指以表去塵    施爲谷響度門    修習空華萬行

산화현제무착   탄지이표거진    시위곡향도문    수습공화만행


深入緣生性海   常遊如幻法門    誓斷無染塵勞    願生惟心淨土

심입연생성해   상유여환법문    서단무염진노    원생유심정토


履踐實際理地   出入無得觀門    降伏鏡像魔軍    大作夢中佛事

이천실제이지   출입무득관문    강복경상마군    대작몽중불사


廣度如化含識   同證寂滅菩提

광도여화함식   동증적멸보리



보통 우리가 보리심菩提心을 발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보리심을 발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보리심을 발하는 건가? 똑 떨어지게 이야기할 길이 없잖아요? 뭣이 흔적이 있어야지.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무발이발無發而發이야. 불도무구고구佛道無求故求라. 구함이 없이 구한다. 세상 논리로 보면 이런 모순이 없는데 이렇게 해야 불교는 이해가 되는 거야. 불교의 어떤 안목이 설명되는 거죠.


묘용무행이행妙用無行而行. 아름다운 행은 행함이 없이 행하는 거야.

진지眞智, 참다운 지혜는 조작이 없이 짓는 것.

길게 설명할 겨를이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각자 소견으로 현실과 연관시켜서  알아서 이해를 하십시오.


흥비오기동체興悲悟其同體라. 자비를 일으키되 그 동체, 나와 한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라.

행자, 비와 자. 여기는 다르죠. 앞에는 悲고 뒤가 慈에요. 자를 행하되  깊이 무연無緣에까지 들어가라. 인연 없는 중생은 불가도라. 구하지 못한다. 부처님 삼불능에 들어있는데. 인연 없는 중생까지 들어가야 그게 자비를 행하는 거지. 


무소사이행단 無所捨而行檀이라. 보시를 하는데 버린바 없이 보시를 행해라. 단야바라밀을 행하라.


무소지이구계無所持而具戒라. 좀 한다고 상내고, 나는 뭘 잘 하네 어쩌네. 가지는 바 없이 구계, 계를 구족하라. 뭘 좀 하고 상내는 것은 차라리 안하고 상 안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좀 잘 한다고 상 내봐요. 돈 좀 번다고 늘 구박이나 하면 “에이, 더러운 돈. 돈 벌지 말고 구박이나 하지 말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세상이 그렇게 되어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되어있으면 그래도 되지만,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그래서 무소지이구계라. 가지는 바 없이 계를 갖추어라. 전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리심, 불도, 묘용, 진지, 비자, 보시, 지계, 정진, 수진. 정진을 닦되 무소기無所起, 일어난 바가 없음이 요달하라. 수빈, 인욕을 익히되 상하는 바 없음을 통달하라.


반야般若, 지혜죠. 반야오경무생般若悟境無生이라.   반야는 생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불생불멸이죠. 그것이 반야다.


선정지심무주禪定知心無住라. 마음이 머무는 바 없음을 알라. 선정이라고 해서 마음이 딱 멈추어있는 것으로 안다면 선정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감무신이구상鑒無身而具相하고, 여기서부터 육바라밀은 그렇다치고 여기는 감무신이구상이야. 우리 몸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환히 비춰 봐. ‘거울 감’자죠. 환히 비치면서 갖출 모습 다 제대로 갖추어란 거죠. 이 세상에서 제일 값진 옷과 영락을 걸치고 있는 이가 누구요? 관세음보살이잖아요. 관세음보살이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야. 그렇게 몸도 마음도 텅 비어 없음을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렇게 치장을 하고 있는 거냐? 치장을 하고 있되 누구보다도 무신無身을 잘 알고 있다. 감무신. 이 ‘감’자는 그냥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야. 몸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알지만 상을 갖출 때는 누구보다도 더 상을 잘 갖춰.


증무설이담전證無說而談詮이라. 설한 바 없음을 알되, 사실 아는 사람은 말한 게 없죠. 말하지 않아도 의례히 갖춰져 있는 것을. 그러면서도 이야기할 것을 다 이야기한다.  무설無說의 도리를 깨달아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말 많이 한 사람이 누구요? 석가모니죠.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는 “나는 한 글자도 설한 바 없노라.” 그랬죠. 증무설이담전이라. ‘전’은 경전이나 말씀을 전이라 하죠.


그리고 건립수월도량建立水月道場,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수월도량을 물에 비친 달과 같이 허망한 도량을 많이 건립해.


장엄성공세계莊嚴性空世界. 성품이 공한 세계를 잘 장엄해. 장엄하면서도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돼. 건립하면서도 허망한 수월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고.


나열환화공구羅列幻化供具야. 공양영향여래供養影響如來라.

부처님이 오셔서 먹나? 설사 부처님이 법신으로 존재한다하더라도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그러면서도 한껏 산더미 같은 공양을 올려라. 산더미 같은 공양을 올리면서도 영향여래라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이게 중도적인 안목입니다. 여래는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고요.

참회죄성본공懺悔罪性本空이요. 참회하되 죄의 본성이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종심기 그러죠.

권청법신상주勸請法身常住라. 법신은 상주합니다. 본래. 상주하고 있는 줄 알지만 다시 또 상주하고 있는 법신을 열심히 청해. “오래 사십시오” “오래 계십시오” 하고 권청하는 게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행위다.


회향료무소득廻向了無所得이라. 회향하되 얻을 바 없음을 깨달아라. 회향하면 그 댓가가 엄청나게 돌아온다는 것을 생각하죠? 그게 아니죠. 료무소득이야. 무소득임을 알아야 돼. 그러면서 회향해야지. 이 구절 하나하나가, 육바라밀에서부터 일상생활에서 절을 세우고, 몸을 어떻게 갖추고, 설법을 하는 문제, 공양구를 올리는 문제, 또 공양구를 받는 부처님의 문제, 참회의 문제, 법신상주의 문제,회향의 문제,


 또 수희복등진여隨喜福等眞如라. 따라서 (함께) 기뻐하는 것은 복이 진여와 같다. 진여와 같다는 것은 따라서 기뻐하는 복이 진여와 같다. 진여는 본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건드릴 것도 없는 거야. 그런데 따라서 기뻐한다는 거야.


 찬탄피아허현讚歎彼我虛玄이라. 부처님이나 나나 허현이야. 텅 비어서 아득하다는 사실. 그걸 알면서 한껏 부처님께 대해서 찬탄하는 거죠.


발원능소평등發願能所平等이라. 능소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아. 잘 알아. 사실은 이치상 그렇게 되어 있지만  우리가 부처님 앞에서 온갖 발원을 다 하는 거야. 부처님이나 나나, 나나 부처님이나 이럴 때는 내가‘능’이 되고 부처님이 ‘소’가 되는 거야. 대상이 되니까. 나나 부처님이나 평등해. 구경究竟에 가서는 하나야. 그런데 나는 보잘것없는 중생이 되고, 부처님은 위대한 성인이 되어 새벽부터 일어나 그 앞에 온갖 발원을 하는 거지. 그렇게 하되 능소평등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해야 돼.


예배영현법회禮拜影現法會라.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그런 법회에 예배하고,


 행도족섭허공行道足攝虛空이라. 이 행도라는 것은 우리가 도량을 도는 거예요. 도량을 돈다든지, 탑을 돈다든지, 행도도 좋은 수행인데 우리나라는 아주 미미해요. 중국에는 아직도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가봤지만 중국에는 법당을 도는 것, 예불하는 시간보다 이 행도, 법당 안에서 그 사람들은 신 신고 돌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법당 전체가. 우리나라도 본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부처님을 돌면 졸음이 옵니까? 염불하기 얼마나 좋아요? 경 읽기 좋고, 기도하기 좋고. 그렇게 돌면서 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요. 몇 배나 많아. 우리가 부처님 앞에 절하는 것보다. 이게 행도야. 행도하되 족섭허공이라. 발로써 걷지만 발이 허공을 밟는다. 행도하되 행도함이 없다. 그런 관념으로 하라는 거죠.


분향묘달무생焚香妙達無生이라. 향을 사르되 묘히 무생을 통달하라.


또 송경誦經, 경을 외우는데 實相을 深通 깊이 통하라.


산화현제무착散華顯諸無着이라. 부처님께 꽃을 올리는데, 꽃을 올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집착하는 바가 없음을 나타낸다.  본래는 산화거든요.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는 꽃을 꽂지만 본래는 꽃을 흩는 거예요. 부처님 앞에. 흩는데 땅에 내려와서 붙죠? 붙어도 붙는 도리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


탄지이표거진彈指以表去塵이라. 잠을 깨운다든지, 남에게 알린다든지 할 때 이렇게(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소리를 내시며)하는 것을 탄지라고 하는데, 어떤 진로가 제거하는 것을 표하는 것. 그러니까 정신이 맑아지는 거죠. 말하자면 졸음에 잠겨있다든지, 정신이 흐려있다든지 할 때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번뇌를 제하는 것을 표한다.


시위곡향도문施爲谷響度門이라. 육도문이죠. 골짜기에 메아리 소리 같은 6바라밀을 시위, 베풀고


수습공화만행修習空華萬行이라. 허공 같은 만행을 수습한다. 공화만행인데 왜 수습하느냐? 공한 줄 알고 수습하고, 수습하되 공화만행으로 알고 수습한다.


심입연생성해深入緣生性海라. 인연으로 생긴 성품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서


 상유여환법문常遊如幻法門이라. 항상 환과 같은, 꼭두각시와 같은 그런 법문에 논다.


서단무염진노誓斷無染震勞야. 물듦이 없는 번뇌 망상을 매섭게 끊어. 이런 말도 보십시오. 본래 번뇌가 물들었다, 그런 이야기 잘 하죠? 본래 우리 마음자리는 물드는 것이 아니야. 물드는 것이 아닌 줄 알면 끊을 게 뭐 있냐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서코 끊어란 말이야. 서단무염진노.


원생유심정토願生惟心淨土라. 유심정토인데 뭘 가서 나기를 원해? 이 분이 아미타불의 후신이라 하고, 염불의 창시자로 추앙을 받는 분인데 유심정토라고 분명히 이렇게 못 박았죠?

그러면서도 유심정토인데 어딜 가서 나긴 나? 날 게 없는 그런 유심정토이지만 가서 나기를 원하는 거야. 어디든지 치우치지 않는 거죠? 차조동시죠. 그야말로. 원생유심정토.


이천실제이지履踐實際理地라. 실제이지, 진리의 자리죠. 진리의 자리를 밟고 무득관문無得觀門, 얻음이 없는 관문에 출입하라. 관문은 보통 우리가 참선을 한다든지, 관을 닦는다든지 온갖 오종신관이라든지 별별 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 관도 얻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야. 그래서 무득관문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출입하고.


항복경상마군降伏鏡像魔軍이야. 거울에 비친 마구니,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뭐가 실제 합니까? 실제 하지 않는 마구니입니다. 실제 하지 않는 마구니면서 항복하고, 항복하되 실제 하지 않는 마구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리고 대작몽중불사大作夢中佛事야. 몽중불사이지만 대작하라. 대작하되 몽중불사임을 잘 알라. 이런 표현들, 불사를 하되 몽중불사임을 알고 불사를 해야 하는 그런 내용이죠. 욕심내어 불사하다가 죽고 달고 하는 그런 사건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 몽중불사인줄 알면 그렇게 무리수를 안두죠?


광도여화함식廣度如化含識이라. 화, 변화한 것 같은 그런 중생을 널리 제도해. 전부 꼭두각시인 중생을 제도하는 거지.


동증적멸보리同證寂滅菩提. 적멸한 보리를 우리 다 함께 증득하여지이다. 적멸보리라면 증득할 게 없지만 그래도 적멸보리를 증득한다.


우리의 상식적인 논리로 본다면 전부 이율배반적인,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들이지만,  불교에서 본 깊은 이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라고 할까요? 제법의 실상의 이치는 이런 말로라야 조금 표현이 됩니다. 표현 다한 것은 아니예요. 표현 다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말이라야 좀 근사近似해.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또 언제 강의할 인연이 될지 다음 시간에 맡기기로 하고, <서장>강의 하다가 중도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참 좋아하는 게송이라서 오늘 소개를 했습니다. 불교를 깊이 이해하는데 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장>강의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불퇴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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