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계 강의 정화스님
제1구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법성(法性)으로 사는 삶이란 '나'와 '너'가 상호 포섭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연기(緣起)의 세계입니다. 연기의 세계를 사는 것을 지혜(智慧)라고 하며 이때에는 저절로 자비(慈悲)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삶 전체가 지혜와 자비로 가득 찬 모습이 법성이기 때문입니다. 연기(緣起)로 하나 된 삶, 법성(法性)
제2구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고요하다
생멸(生滅), 동정(動靜)을 전체적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제한된 시공을 좇는 업상을 떠난 것이 고요한 삶입니다. 법성(法性)으로 원융(圓融)하게 사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본래(本來) 고요함입니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들의 본래 모습입니다. 무아(無我), 무상(無相)의 연기법(緣起法)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둥글고 오묘한법 진리의 모습이여 고요뿐 동작없는 삼라의 바탕이여
이름도 꼴도없고 일체가 다없거니 아는이 성인이고 범부는 왜모르나
묘하고 깊고깊은 현묘한 진성하여 제자리 벗어난듯 세계를 나툼이여
하나에 모두있고 많은데 하나있어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개체이니
한티끌 작은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낱낱의 티끝마다 우주다 다들었네
한없는 긴시간이 한생각 일념이고 찰나의 한생각이 무량한 긴겁이니
삼세와 구세십세 엉킨듯 한덩이듯 그러나 따로따로 뚜렷한 망상이여
초발심 했을때가 부처를 이룬때고 생사와 열반경계 바탕이 한몸이니
있는듯 이사분별 흔연히 없는그곳 자나불 보현님의 대인의 경계로세
서가님 해인삼매 그속에 나툼이여 쏟아진 여의진리 그속에 부사의여
허공을 메워오는 거룩한 법비로서 제나를 중생들로 온갖원 얻게했네
행자여 돌아가라 진리의 고향으로 망상을 쉬고가라 헛길을 가지말라
교묘한 절대방편 그길로 찾아가라 여의주 노자얻어 부처님 고향으로
끝없이 쓰고쓰는 다라니의 무진보로 불국토 법왕궁을 한바탕 꾸미고서
중도의 해탈죄에 앉으면 깨달으리 옛부터 그랬었네 이름이 부처로다
제3구 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어져
우리의 삶은 어떤 이름으로도, 어떤 모양으로도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연속된 흐름과
불연속인 변화의 이중성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생생한 삶은 변화만 있을 뿐, 변화의 주체는 없습니다.이것을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춤이라고 합니다.
분별(分別) 떠난 삶,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춤
제4구 證智所知非餘境 증지라야 아는 바이지 다른 경계는 아니네
나와 너의 분별(分別)을 넘어서 전체가 하나의 지(智)로 나타나는 순간이 증지(證智)입니다. 능소(能所)가 한 삶으로 있는 것, 나와 너가 일법계(一法界)가 되어 열린 마음의 활동이 증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성(空性)이 그대로 나타난 진여(眞如)의 모습입니다.
증득(增得)된 깨달음의 노래
제5구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은 깊고 깊으며 가장 미묘해
번뇌(煩惱)가 다 사라진 정적(靜的)인 해탈(解脫)모습에서 잠시도 쉴 새 없이 자기를 연출하고 있음은 참으로 미묘하고 깊은 이치입니다. 이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인 연기(緣起)의 공성(空性)이 모든 존재의 근원(根源)이면서 동시에 현상(現象)이며,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으며 시공(時空)을 떠난 데서 시공으로 차별되어 나타났으며 시공의 차별 그대로가 시공을 떠나 있는 모순(矛盾)의 동일성이기 때문입니다. 삼독(三毒)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제6구 不守自性隨緣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따라 이루네
모든 법들은 지킬 자성(自性)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關系) 속에서 스스로 끊임 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화(變化)가 자성입니다. 변화와 부동(不動), 이것과 저것이 어울려 있는 한 장면이 공성(空性)의 장, 무자성(無自性)의 장입니다. 공성의 장(場), 수연(隨緣)의 빈 모습
제7구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속에 모두가 있고, 모두 속에 하나가 있으며
연기법(緣起法)의 근본원리는 하나하나의 이것과 저것은 그 자체로 존립(存立)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낱낱의 '나'기 모두 온 우주만큼이나 큰 생명의 장(場)으로 살고 있으며, 우주는 모든 생명의 수만큼 겹쳐진 생명의 우주입니다. 이를 화엄(華嚴)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고 부릅니다. 상입(相入)의 세계
제8구 一卽一切多卽一 하나 그대로 모든 것이며 모든 것 그대로 하나다
이것과 저것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장(場)에 함께 있습니다.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의 관계(關系)도 이와 같습니다. 그 낱낱이 우주법계를 이루는 원인(原因)이면서 동시에 우주법계의 모든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낱낱의 얼굴이 존재합니다. 일체만물(一切萬物)이 이 연기실상(緣起實相)의 장에서 완전히 동일한 생명을 이루는 전체(全體)이며 부분(部分)이고, 부분이며 전체입니다. 상즉(相卽)의 세계
제9구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화엄(華嚴)에서 나투는 부처님의 세계는 티끌 먼지 하나에서부터 온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대소장단(大小長短)의 어느 것에나 차별 없는 법계(法界)이면서 대소장단으로 나툽니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불성(佛性)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緣起法界
제10구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마다 또한 그러하네
무명(無明)의 한 생각이 온 법계(法界)를 무명화(無明化)하며 진여(眞如)의 빈 생각도 온 법게의 울림입니다. 무상의 흐름을 분명히 아는, 마음이 깨어 있는 순간이 법신(法身)의 나툼입니다. 이때에는 티끌 하나하나도 총체적 우주의 빛인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불의 나툼입니다. 티끌 하나가 우주의 몸
제11구 無量遠劫卽一念 한량 없이 먼 시간이 한 생각이요
시간도 하나의 법(法)이며 법은 공성(空性)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면서 오히려
시간 밖에 존재하는 모든 순간의 시간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시간이 '공성의 한 순간의 시간'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데서 '현재의 한 순간'이 됩니다.
시간을 넘어 한 법계(法界)로
제12구 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한량 없는 시간이며
중생(衆生)의 업(業)이 수행에 의해 지혜(智慧)로 전환되어 진여공성(眞如空性)에서 나투는 시간의 무자성(無自性)을 여실히 알아차릴 때, 마음에 일어나는 한 순간의 시간이 무량(無量)한 시간이 됩니다. 무자성(無自性), 연기(緣起)의 한 울림
제13구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와 십세가 서로 같지만
연기(緣起)의 장(場)은 나눌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언제나 연기의 장이라는 총상(總相)에서 낱낱이며 이 낱낱이 그대로 연기의 장인 데서만이 서로거 서로를 살리는 것입니다. 연기의 장에서 낱낱은 무자성(無自性)의 공성(空性)으로 동일하며 그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보면 서로 다른 것입니다. 낱낱의 별상(別相)이 총상(總相)을 껴안고
제14구 仍不雜難隔別成 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루네
인연(因緣)의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독립된 개별자(個別者)로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낱낱이 스스로 정체성(正體性)을 갖지 못하고 뒤섞여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과의 인연관게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 없이 변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변화만이 삶일 수 있으며 여기에서 제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치도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제15구 初發心是便正覺 처음 발심할 때가 바른 깨달음이며
세상의 모든 법들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살게 해주면서 그로써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화엄(華嚴)의 중중무진연기법계(重重無盡緣起法界)이며 그대로 비로자나(毘盧疵那)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한마음'은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나투는 '전체'로서 깨달은 마음입니다. 깨들음을 향한 깨달음 마음
제16구 生死涅槃常共和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항상 함께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 빈 마음으로 생사의 모습을 지켜볼 때,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닌
연기관계(緣起關系)에서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일 뿐. 실체가 없는 생사를 보게 됩니다.
곧 생사가 여래법신(如來法身)이며 화엄(華嚴)의 세계입니다.
빈 마음으로 여실(如實)히 지켜보기
제17구 理事冥然無分別 이(理)와 사(事)가 하나되어 분별이 없으니
마음이 마음인 데서 보면 인식 주관으로 한정된 듯하지만 이 마음이 그대로 온갖 대상이 되고, 대상이 대상인 데서 보면 인식대상으로 한정된 득하지만 이 대상이 그대로 일체 만상으로 나툰 마음이니 마음에서 대상을 대상에서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를 명연(冥然) 곧 차별을 꿰뚫고 혼연일체로 하나된다고 하였습니다.
원융(圓融)한 한모습이니
제18구 十佛普賢大人境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과 큰사람의 경지네
빈 모습 속에 나투는 지혜덕상(智慧德相)의 부처님 세계가 보리심(菩提心)이며 대원력(大願力)이니 10불은 보리심을 말하고, 보현보살은 대원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말로 나타내자니 큰사람의 경지라 하고 있습니다. 마음 하나 꿰뚫어
제19구 能人海印三昧中 부처님께서 해인삼매(海印三昧) 가운데
능인(能人)이란 비로자나(盧疵那佛) 부처님이며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한정되어 있는 마음을 놓을 때 온 우주의 마음이 스스로 나타납니다. 모든 중생과 사물들이 그 마음 가운데서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나툽니다. 이처럼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이루어진 중중무진한 생명의 장을 해인삼매(海印三昧), 곧 깨달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삶을 여실히 아는 청정한 마음
제20구 繁出如意不思意 뜻대로 부사의(不思議)함을 나타내고
해인삼매(海印三昧)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중생들과 사물들의 걸림 없는 세계,
이와 같은 온갖 생명들의 향연이 빈 마음자리인 여의(如意)에서 뜻대로 나툰 것입니다.
빈 마음, 걸림 없는 세계로
제21구 雨寶益生滿虛空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니
빈 마음이 되어 조그만 바람마저 없을 때 도솔천(兜率天)의 삶을 뛰어 넘어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낱낱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智慧德相)으로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곧 온 우주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빈 마음의 보배로운 삶
제22구 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은 그릇 따라 이익을 얻네
닫힌 마음의 중생업(衆生業)버릴 때, 해인삼매(海印三昧) 가운데서 동일시공(同一時空)과 무한시공(無限時空)에서 사는 모든 중생과 사물들이 제 모습대로 삼계(三界)에 살면서 삼계를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인삼매의 무한히 열린 시공에서 한없는 공덕으로 상호(相互) 열린 세계의 빛을 나투고 있는 것,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이익입니다.
상호 열린 세계의 빛으로
제23구 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음자리로 돌아와서
수행자란, 생각생각에 개념으로 파악하는 모든 상(相)을 여의고 마음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무심(無心)일 때를 말합니다.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의 전부입니다. 거짓 없는 빈 마음을 그대로 쓰는 것이 수행자가 자신의 자리에 돌아온 것이며 제 모습입니다. 마음의 빛으로 부처님을 삼으심
제24구 ?息忘想必不得 망상을 쉬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으니
우주법계(宇宙法界)함께하는 연기실상(緣起實相)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생각흐름을 그대로 두고 빈 마음으로 지며볼 때, 곧 근본 빈 마음자리에서 생각의 흐름을 지켜 볼 때,
생각 생각에 부동심(不動心)얻게 되어 그 자체로 망상이 쉬게 되고 본래 마음자리가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제25구 無緣善巧捉如意 분별을 떠난 교묘한 방편으로 뜻대로 여의보배를 잡아
분별 없는 그저 지켜보는 수행으로 일체가 마음자리의 나툼을 알게 되기 때문에 무연(舞緣)이라 합니다. 또한 마음 없는 데서 마음을 나투어 중생의 세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게 하니 방편이라고 합니다. 홀연히 한 마음 일어나니
제26구 歸家隨分得資糧 집에 돌아가 분에 따라 자량을 얻네
근본 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량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법계 전체에 보배를 보내고 있는 것이며 그 보배로 일체 중생의 온 삶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로 온전히 열림
제27구 以陀羅尼無盡寶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
순간순간 깨어있는 마음이 법계(法界)를 이루는 보배이며 이 마음은 늘 새롭게 세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함 없는 보배인 깨어 있는 순간순간의 한 마음이 바로 연기법계(緣起法界)의 총상(總相)이 되어 모든 것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라니(陀羅尼) 곧 총지(摠持)라고 합니다. 다함없는 불성(佛性)의 빛으로
제28구 莊嚴法界實寶殿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해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하는 것은 깨어있는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깨어있는 마음만이 삶의 온전한 모습이며 법계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법계를 장엄하는 다라니의 한없는 보배란 마음 마음이 인연따라 한없는 모습으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제29구 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실제의 중도자리에 앉으니
중도의 자리란 어떤 특정한 시공(時空)의 자리가 아니라 온 생명이 어울려 있는 한 삶으로서의 자리를 말하며 이것을 화엄(華嚴)이라 합니다. '마침내'란 처음을 포함한 말로 처음과 끝이 없는 데서 처음과 끝을 세우니 그것이 진여법계(眞如法界)에서 말하는 중도의 자리입니다. 중도(中道), 실천(實踐)으로 나타나는 현상
제30구 舊來不動名爲佛 옛부터 움직이지 않아 부처라 이름하네
엣부터 그대로 빈 마음의 중도실천을 부처님이 하는 것은 바로 형상이나 이념의 명사화를 떠나 동사의 관계 속의 변화인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이름붙여진 연기실상(緣起實相)을 말합니다. 관계 속의 변화인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견도위(見道位)에 오른 수행자가 수습위(修習位)의 수행을 해가고자 할 때 세우는 원(願) 가운데 하나에, 그전까지 이룩했던 선정 등의 수행력을 비우고 다시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서 수행을 하고자 하는 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자의 수행이란 무엇을 이룩하여 소유하는 바가 아니라 수행으로 얻는 과(果)조차도 비어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돌이켜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 보면 끊임없이 이 일 저 일로 마음이 들떠서 스스로도 힘들고 이웃도 임들게 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도 소유하고 물질도 소유하고 있는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형상으로 나타낼 수도 없는 것을 마음, 영혼, 정신, 실체, 신, 부처 등의 갖가지 이름으로 소유하고 있으니, 보이는 물질과 형상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모든 것이 소유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이 또한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인 줄 돌아보면 다 알 수 있는데도 끊임 없이 계속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업(業)의 경향성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마음인 이 초심(初心)이 선의 마음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마음은 선에 대한 일체의 분별이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업의 경향성을 떠나 있는 접점(接點)으로 곧 무소유의 공이며 연기실상을 그대로 나투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다운 마음은 매순간 살아 있는 마음이며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마음으로 시공의 제한을 벗어난 마음입니다. 여기서 '옛부터'라고 하는 것은 시간을 직선으로 보고 시작과 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옛이 아닙니다.
시작과 끝을 갖는 시간은 늘 말했듯이 시공(時空)을 소유하는 것이며 사람을 삶답게 할 수 있는 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어진 시공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펼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인 줄을 사무치게 알 때 머뭄 없는 시공에서 무한(無限)한 창조(創造)가 가능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잃을 바 없는 곳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흔들림 없이 살게 됩니다. 그것이 '움직이지 않음'입니다.
소유에 이름 붙여진 모든 상으로부터 자유스러워 질 때가 움직이지 않음이며 이 마음이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수행(修行), 곧 행을 닦는다는 것은 소유를 지속시켜 가는 마음이 변계소집성에 의한 자아의식의 표현임을 확실히 알고 무소유의 빈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자신과 대상의 어떤 것에도 소유를 위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움직이지 ?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음이란 소유 없는 마음, 곧 끊임 없는 변화와 아무런 제약 없이 함께 하는 삶입니다. 소유 없이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살 때, 과거가 우리를 지배하지도 미래가 우리를 지배하지도 않으면서 현재가 우리를 지배하지도 않으니, 삼세(三世)가 있되 삼세가 고정되지 않은 시간에서 삼세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부터 흔들림 없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앞서 말한 중도의 자리에 앉아 있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이면서 파도며 파도이면서 물이고, 물이면서 얼음이며 얼음이면서 물인 것 등의 접면(接面)으로 비유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은 어느 한 모습으로 고정될 수 없으며 그 이면에 변화의 주체도 없으며 단지 전체의 관계에서만이 각각의 모습으로 나투고 있는 연기실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유가 다 사라질 때, 바? 말하면 미세망상의 업식을 다 떨쳐버렸을 때 법계등류(法界等流)의 지(智)를 화복하게 됩니다. 이것을 증지(證智)라고 하여 해오(解悟)와 구별하고 있습니다. 해오란 학습으로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오를 진리를 아는 기준으로 삼을 때 그것이 해오인 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지적(知的) 이해가 또다시 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갖가지로 대립과 갈등을 불러오게 됩니다.
더 나아가 신통과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말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사회적 고통의 원이 되고 있음은 종교적 갈등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중도의 실천뿐입니다. 온생명으로 사는 중도의 실천에는 인종이나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종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에 따라 차별이 있다고 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불만과 갈등만을 증가시켜 왔으며, 오늘날에도 이 힘은 끊임없이 시대적 고난을 상속시켜갈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 그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어떤 조사 스님께서 "나는 부처라는 소리가 가장 듣기 싫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지막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옛부터 그대로인 빈 마음의 중도실천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형상이나 이념의 명사화를 떠나 동사의 관계 속의 변화인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이름붙여진 연기실상을 말합니다.
특히 형상이나 이념, 종교적 신념 말고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진실의 근거조차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업입니다. 특별히 자기중심적인 어떤 것이 없는 듯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또한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알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형상이나 이념에 의한 분열, 종교적 신념, 스스로 세운 진리의 근거 등등이 실은 포장된 이기심(利己心), 자아의식(自我意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 관(觀)입니다. 관으로 자라를 꿰?어 자아의식을 벗어났을 때만이 불교 곧 깨달음에 대한 수행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이룬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고 이름할 뿐입니다.
업의 중심인 자아의식을 완전히 비우고 깨달음이 일상이 되기를 빌면서 이만 법성게(法性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성불(成佛)하십시오. 정화(正和) 합장
*정화(正和)스님은 고암(古庵)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해인사, 송광사 등에서 수행정진하셨습니다.
풀어 쓴 책으로는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함께 사는 아름다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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