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연기법

희명화 2013. 2. 10. 17:53

 

수/행/의/기/초/


6. 연기법(緣起法)


(1) “연기법이 무엇일까?” 하고 묻는 여기에 연기법이 성립해 있다.


(2) 한 생각이 일어나면 연기법이 성립하고, 한 생각이 사라지면 연기법이 소멸한다.


(3) 한 생각이 일어나도 한 생각이 없으면 연기법은 곧 공(空)이요 중도(中道)이다.


(4) “이것이 있을 때 저것도 있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은 혼자 있을 수 없고, 서로 의지하여 있다. 즉,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있거나 동시에 없는 것이다. 동시에 있는 것을 두고 ‘서로 인연하여 생기는 법’이라는 뜻으로 연기법(緣起法)이라 하고, 동시에 없는 것을 두고 ‘모두가 사라졌다’고 하여 공(空)이라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하여 중도(中道)라고 한다.


(5) 동시에 있거나 동시에 사라지는 것은 밖에 있는 사물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마음의 문제이다. 즉, 연기법이든 공이든 마음의 문제이지, 경계의 문제가 아니다.


(6) 동시에 있다는 것은 곧 이것과 저것을 분별한다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면 곧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어서, 이것에도 머물고 저것에도 머문다.


(7) 동시에 없다는 것은 곧 이것과 저것의 분별에서 떠난 것이다. 이것과 저것의 분별에서 떠났으니,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으니, 이것에든 저것에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8) 그러므로 연기법은 곧 분별법이며, 동시에 분별에서 해탈하는 법이다.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여 세우면, 곧 이것과 저것이 따로 있어서 이것과 저것에 얽매인다.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여 세우지 않으면 곧 이것과 저것이 따로 없고, 이것과 저것이 따로 없으면 이것과 저것에서 해탈한다.


(9) 서양철학에서 사유의 법칙을 연구하는 논리학(論理學)에서는 분별사량(分別思量)의 기본원리를 모순율(矛盾律)이라고 하는데, 이 모순율이 곧 연기법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모순율은 “이것은 이것 아닌 것이 아니다.”(A는 비(非)A가 아니다.)라는 원리이다. 즉, ‘이것’은 ‘이것 아닌 것’과 다르다고 분별함으로써,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이 따로 성립하게 되는 원리가 곧 모순율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것 아닌 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되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것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본래 서로 인연이 되어 발생하는 연기법(緣起法)이다.


(10) 연기법에서 서로 연기하여 발생하는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은 동시에 있거나 동시에 없다. 동시에 있는 것을 분별(分別)이라 하고, 동시에 없는 것을 공(空)이라 한다. 즉, 동시에 있으면 세계는 온갖 삼라만상의 집합체이고, 동시에 없으면 세계는 다만 둘이 없는 허공이다.


(11) 동시에 있느냐 동시에 없느냐 하는 것은 세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법은 본래 한가한데, 사람이 스스로 시끄럽다.”고 하듯이, 세계는 만법(萬法)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 오직 사람이 오온(五蘊)을 분별하고 공(空)을 말하며, 제상(諸相)을 말하고 비상(非相)을 말하여, 스스로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헤매며 번뇌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오온이 곧 공(<반야심경>)이고, 제상이 곧 비상(<금강경>)이라고 가르치신다.


(12)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말은 마음이라는 물건이 있어서 이 물건에서 삼라만상이 만들어져 나온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분별하여 삼라만상이 있다는 말이다. 분별하는 마음에는 삼라만상이 있고, 분별을 떠난 마음에는 둘이 없다. 분별하여 삼라만상이 있는 것을 세간법(=속제(俗諦))이라 하고, 분별을 떠나 둘이 없는 것을 출세간법(=진제(眞諦))이라 한다. 그러므로 분별하면 물결로 보이고 분별하지 않으면 물이 있을 뿐이듯이, 마음 밖에 삼라만상이 따로 없고 삼라만상 밖에 마음이 따로 없다.


(13) 세계는 하나의 세계일 뿐이고, 분별하여 망상에 집착하느냐 공을 체득하여 해탈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14) 공을 체득하여 해탈하라는 것이 곧 중도의 실현이며, 연기법의 가르침이다.


(15) 지금 세계는 분별로 이루어지듯이, 공 역시 지금 체험되는 것이고, 중도 역시 지금 실천되는 것이다.


(16) 연기법이니 공이니 중도니 하는 것은 객관적 대상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마음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 속의 객관적 대상들의 관계를 말할 때에는 연기(緣起)라 하지 않고 인과(因果)라 한다. 인과법(因果法)과 연기법은 다른 내용이다. 인과관계는 종치는 일과 같고, 연기법은 물지게를 지는 것과 같다. 종을 치는 원인이 있으면 종소리가 울리는 결과가 있는 것이 인과법이고, 물지게는 양쪽에 같은 무게의 물통을 달아야 질 수가 있다. 종을 치는 일과 종소리가 울리는 것은 선후가 있지만, 물지게 양쪽에 매달린 두 개의 물통에는 선후가 없다. 인과법은 두 개의 사물을 분별한 다음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다시 분별하여 말하는 원리로서 분별이 만든 원리이다. 반면에 연기법은 그러한 분별이 일어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인과법은 분별로 완전히 이해되지만, 연기법은 분별로 이해될 수 없고 분별을 떠난 공을 체험할 때 비로소 납득이 되는 원리이다. 즉, 연기법은 연기법이 어떻다는 분별이 사라질 때 참으로 실현되고, 인과법은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당연히 인과법에서 원인과 결과는 수없이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연기법에서 ‘이것’과 ‘저것(=이것 아닌 것)’은 언제나 단순히 ‘이것’과 ‘저것(=이것 아닌 것)’ 둘 뿐이다.


(17) 공(空)의 체험 곧 중도(中道)의 실현은, 분별이 어떻게도 손을 쓸 수가 없어 분별이 스스로를 포기할 때, 즉 생각의 앞뒤가 꽉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할 때에, 홀연 저절로 소식이 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깨달음, 혹은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18)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 이어짐도 없고 끊어짐도 없다./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다./ 오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다. 이러한 연기를 잘 말씀하셔서,/ 모든 쓸데없는 논의를 잘 소멸시키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절하옵니다./ 부처님의 연기에 대한 말씀은 모든 말씀 가운데 최고이십니다.”(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 첫 머리의 이 게송은 바로 모든 쓸데없는 논의들 곧 모든 분별된 생각들을 연기법을 통하여 소멸시키는 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밝히고 있다. 생겨남, 소멸함, 이어짐, 끊어짐, 같음, 다름, 오는 일, 가는 일 등의 개념들은 모두 그 모순개념들 즉, 생겨나지 않음, 소멸하지 않음, 이어지지 않음, 끊어지지 않음, 같지 않음, 다르지 않음, 오지 않음, 가지 않음 등과 짝으로 생겨나고 짝으로 사라지는 연기법(緣起法)이다. 즉, 이런 개념들은 모두 우리의 분별에 의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허망한 것일 뿐,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사실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중론> 전체를 통하여 나가르주나는 어떤 개념도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모든 개념은 독자적인 존재성 즉 자성(自性)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마음이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중론>이다. <중론>의 이러한 가르침은 곧 연기법을 가르치는 것이니, 연기법은 분별을 통하여 분별의 허구성을 밝혀서 분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므로, 분별 가운데 최고의 분별이 곧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분별하여 개념으로 드러나는 모든 말들이 전부 쓸데없는 논의 즉 희론(戱論)이지만, 그 가운데 부처님의 연기에 대한 가르침만은 비록 분별이긴 하지만, 분별을 소멸시키는 분별로서 다른 분별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모든 말들은 다 허망하지만, 부처님의 방편설(方便說)만은 예외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연기법의 가르침은 단순히 하나의 철학 이론이 아니니, 이 가르침을 통하여 문득 분별에서 빠져 나와(즉, <중론>의 가르침에서도 빠져나와) 해탈을 체험하게 되고 세계의 실상(實相)에 발 딛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는 속제(俗諦=분별로 나타내고 이해하는 진리)에서는 분별과 분별 없음을 세우지만, 진제(眞諦=분별을 떠난 진리)에서는 분별과 분별 없음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념이 소멸되는 체험을 맛보라고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 곧 연기법이고,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역시 분별이어서 분별을 가지고 분별을 벗어나고자 하는 어려움이 있다. 당장 선 자리에서 분별을 버리고 실상을 맛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실천이 바로 조사선(祖師禪)이다.


(19) <육조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중도를 말하고 있다 : “문득 어떤 사람이 너에게 법을 묻는다면 말을 하되 모두 짝을 이루게 하여 대법(對法)을 취하고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마침내 두 상대법을 모두 제거하여 또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뜻을 묻되, ‘있음’을 물으면 ‘없음’으로 대답하고, ‘없음’을 물으면 ‘있음’으로 대답하고, ‘범부’를 물으면 ‘성인’으로서 대답하고, ‘성인’을 물으면 ‘범부’로서 대답하되 두 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중도(中道)의 뜻을 밝혀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을 일컬어 어둠이라고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답하기를, ‘밝음이 인(因)이고 어둠이 연(緣)이니 밝음이 없음이 곧 어둠이다.’고 하라. 밝음으로써 어둠을 드러내고 어둠으로써 밝음을 드러내니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어 중도의 뜻을 이룬다. 나머지 물음도 모두 이와 같다. 너희들은 이 후로 법을 전함에 이것에 의지하여 서로 번갈아 가면서 가르치되 종지(宗旨)를 잃지 않도록 하라.”


(20) 다음과 같은 선사들의 말은 바로 중도를 가리키고 있다 : “선도 생각하지 마시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무엇이 도명(道明) 상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까?”(육조혜능)

 

“가령 누군가 나무에 올라가서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는 손으로도 가지를 잡지 않고 발로도 나무를 딛지 않고 있는데, 나무 아래의 어떤 사람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묻는다고 하자. 대답하지 않으면 그가 묻는 것에 어긋나고 만약 대답한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향엄지한)

 

“해중(奚仲)이 백 개의 살을 가진 수레를 만들면서 두 바퀴도 뽑아버리고 굴대도 떼어버린 것은 어떤 일을 밝히려는 것인가?”(월암화상)

 

“도는 아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것에도 속하지 않으니, 안다고 하는 것은 망령된 깨달음(妄覺)이요, 모른다는 것은 깜깜한 것이다. 만약 참으로 할 일 없는 도에 통달한다면, 마치 허공과 같이 텅 비고 탁 트일 것이니, 어떻게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지겠는가?”(남전보원)

 

죽비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는 말했다. “여러분이 만약 죽비라고 부른다면 모습을 따라 분별하는 허물이 있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죽비라는 물건에 위배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말해 보라. 무엇이라 부르겠느냐?”(수산성념)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무문혜개)


(21) 생각이 머물 곳이 없어서 문득 분별에서 손을 놓으면, 분별 속에서 분별이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이 곧 중도요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분별에서 손을 놓는 체험을 분별을 통해서 이루어내기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저 깊고 간절한 관심으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저절로 이러한 체험이 찾아오는 것이다. 아무런 의지처도 희망도 없이 앞뒤가 꽉 막혀 있는데, 갑자기 저절로 찾아오는 체험이 참된 체험이다. 그리하여 큰 믿음(=대신심(大信心)) 속에서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캄캄한 어둠(=대의단(大疑團)) 속으로 들어가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되돌아가지 않고 분발하면(=대분심(大奮心)) 크게 깨닫게 된다.


(22) 그러므로 진실로 분별에서 해방되는 연기법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당장 모든 지식을 놓아 버리고, 모든 생각에 의지하지 말고, 어떻게도 분별하지 말고, 다만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도 분별할 수 없는 꽉 막힌 곳에서, 오로지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3) 연기(緣起)는 무승자박(無繩自縛)이요, 중도(中道)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이다.

 

여기 10원짜리 동전이 하나 있다. 한 쪽은 탑이 그려져 있고, 다른 쪽은 10이라는 숫자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동전의 앞면은 어느 쪽이고 뒷면은 어느 쪽일까 하고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의문은 풀리지 않고, 이 사람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정하지 못하여 불만족스럽다. 이 사람은 결국 여러 곳에서 물어 보고 나름으로 이유를 갖춘 뒤에는 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정할 것이다. 앞면과 뒷면이라는 관념이 고정되고 나면 이 사람은 만족하고 안심한다. 본래 동전 스스로는 앞면과 뒷면이라는 관념이 전혀 없는데, 사람은 그렇게 분별하여 정하지 않으면 불만스럽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속(世俗)이라는 세계는 이처럼 사람이 분별하고 이해하고 정한 세계이다. 정신적인 세계이든 물질적 세계이든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사람은, 나와 너, 세계와 사람, 삶과 죽음, 이것과 저것 등등 모든 것들을 분별하여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세속세계이며, 망상의 세계이며, 연기로 나타난 세계이다. 세계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분별도 관념도 이름도 없다. 사람이 스스로 분별하고 이름을 붙여 자신과 세계를 틀 속에 넣어 고정시키는 것이다. 즉, 포승줄도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묶이는 것이다.(無繩自縛)

 

사람이 스스로를 묶는 방식이 바로 분별이라고 부르는 연기(緣起)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을 나누는 것이다. 세계에는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이라는 분별도 이름도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분별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은 언제나 서로서로 의지하여 쌍으로 동시에 나타난다. 즉,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은 서로 다른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을 서로 상관없는 두 개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 이처럼 본질은 둘이 아닌데(즉, 불이(不二)인데), 둘인 것처럼 보고 있는 이것이 바로 중생의 전도(顚倒; 뒤집어진)된 어리석음이요, 모든 번뇌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본래 둘이 아닌 세계인데 우리 스스로 분별하여 둘인 세계로 보고서 이 망상(妄想)에 묶여 있다. <육조단경>에서 “법에는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것이다.”라고 한 말이나, “모든 허물은 나에게서 말미암는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이 망상에서 풀려나는 일 역시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사람이 망상을 만들었으니, 사람이 스스로 망상에서 놓여나야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묶인 것은 스스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結者解之) 그런데 스스로를 묶고 있는 그 손으로 스스로를 풀 수는 없다. 자기 손으로 자기를 묶고 있는 것을 놓기만 하면 되는데, 자기 손으로 지금 자기를 묶고 있다는 것을 설사 이해한다고 하여도, 스스로 그 손을 놓기는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까닭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렇게 묶고서 살아왔기 때문에, 묶은 손을 뗀다는 것은 너무나 생소하여 전혀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어린아이가 한 명 있다. 이 아이 앞에는 맛있게 보이는 화려한 사탕을 넣어 놓은 투명한 병이 있는데, 병 입구는 어린아이의 손을 오므려야 겨우 들어갈 만큼 좁다. 어린아이는 사탕에 홀려서 병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사탕을 한웅큼 쥐고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손이 나오지 않는다. 한참 동안 아이는 손을 빼내려고 애를 쓰지만, 손은 도무지 빠지질 않는다. 더럭 겁이 난 아이는 울기 시작한다. 울음소리에 어머니가 달려온다. 상황을 파악한 어머니는 찬장에서 더욱 화려하고 맛있어 보이는 과자를 꺼내 아이 앞에 보여주며 이것을 먹으라고 한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사탕을 놓고 손을 병에서 빼낸다.

 

스스로 묶였지만, 스스로 풀지 못하고, 이렇게 풀려나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이란 이런 것이며, 마음공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풀려고 하지 말라. 묶을 줄만 알고 풀 줄은 모르니 발버둥칠수록 더욱더 묶을 뿐이다. 바른 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오직 이 길만이 자신이 풀려나는 가장 쉽고도 바른 길이다.


(24) “연기법이 무엇인가?” “탁!”(책상을 침)

“깨달음이 무엇인가?” “탁!”(책상을 침)

“부처가 무엇인가?” “탁!”(책상을 침)


(25) “탁!”(책상을 침) 여기에서 모든 분별과 분별 아님이 동시에 모조리 소멸하고 다만 이것뿐이다. “탁!”(책상을 침)

 

[무심선원/지대방/월간 無事人] 19. 무사인 2006년 7월호(5~14쪽) "연기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