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사기꾼’ 문제는 비단 외국의 몇몇 사람들에게 국한된 문제는 아닙니다. 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칫하면 빠져들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먼저 그 원인이 무엇이며, 문제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명심해야만 할 것은 견성이 이 공부의 최종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견성은 이 공부의 ‘입문’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견성 체험이 있기 전에는 비록 머리로 영적인 실상을 이해한다고는 하나 그것은 생각일 뿐이며, 법(다르마)을 보는 안목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눈도 뜨지 못하고 전혀 캄캄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견성체험을 하게 되면 영적 실상에 대해 많은 것이 이해되고 마음의 동요도 가셔질 뿐만 아니라, 고요하고 평안함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천하를 얻은 듯이 기고만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내가 깨달았다!”라는 성취감에 사로잡히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견성했다 하더라도 ‘에고’를 자신으로 알고 알아온 오랜 세월 동안의 과거 습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남아있다면 그는 아직도 깨달음이 무엇이지를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에고는 하루아침에 쉽게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현상 세계에서 개체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동안은 에고와 함께 가야만 하며, 그래서 견성 이후라도 언제든지 에고와의 동일시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견성 이후의 공부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아드바이타(불이일원론) 계통의 수행자들이 이따금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원인은 가르침 자체의 특성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힌두교 아드바이타 베탄타 철학의 창시자인 상카라는 “브라흐만만이 참 실재요, 시공의 세계는 허상에 불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견성 체험자가 법성(法性:절대성)으로 경도될 때,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이 태양의 광채 속에서 녹아 없어지듯 만물도 영원한 실재 속에 녹아 없어진다.
속박도 그 속박에서 벗어남도 모두 신기루 같은 것. (……) 제한도, 놓음도, 속박도, 성공도 없다. 자유를 찾는 이도, 자유로운 이도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진리이다.”
따라서 아드바이타 계통의 견성 체험자들은 현상 세계를 도외시하고 절대계에 안주하려는 특성을 가집니다. 허상에 불과한 현상세계에는 미련도 관심도 없다는 것이죠. 이 경우 두 가지 방향으로 치닫게 됩니다. 하나는 절대계에 안주해 자기만의 윤회에서 벗어남과 해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상세계는 어차피 허상이요 환영에 불과하므로 어떻게 행동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도덕적 아나키즘에 빠지게 됩니다.
불교 또한 따지고 보면 불이일원론이므로 초기불교, 즉 소승불교는 이 같은 경향이 농후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열대지방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출발부터가 개인적 고통에서의 해방이라는 목적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견성 이후에 현상세계, 즉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하고 경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견성체험자를 단지 아라한과를 증득한 ‘보살’이라고 불렀습니다. 대승불교는 보살은 공부가 끝난 사람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며, 그가 거쳐서 완성에 이르는 단계를 10단계(보살 10지)로 설정했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부지런히 육바라밀을 닦아서 한 계단씩 올라가야만 비로소 공부가 끝난다고 가르쳤습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은 계․정․혜의 삼학을 아우르는 것으로 특히 이중에서 보시와 지계는 타인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물론 사회적 윤리를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드바이타 견성체험자의 경우 이 같은 견성 후 수행과정이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엇길로 빠질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실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에고는 견성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세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참나의 빛으로 제어해야만 여법해질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견성 체험이 모든 공부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때부터 비로소 진짜 공부는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네이버 카페 진여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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