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 나타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수다원이라고 하는 이름은 '흐름으로 들어간다' 라고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들어갈 게 없습니다.
들어간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별심이 있는 것이고, 들어갈 게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납득하고, 믿고, 확신을 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수다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사람입니다.
들어갈 게 없기 때문에 이름해서 수다원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다원이란, 이름자체는 흐름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지만, 들어갈 게 없기 때문에 사실은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다함 이란 일왕래를 말함 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내가 사다함이라는 결과를 얻었다고 샐각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이란 이름은 한 번 왔다 간다고 하는 것인데, 그러나 실제로는 왕래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름과 모양을 다라가면, 분명히 오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작용으로 본다면
오는 것이나 가는 것이나 하나의 작용인 것입니다. 오직 작용하고 있는 이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마음을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흐름에 들어온 수다원 이나, 한번 오간다는 사다함이나, 모두 똑같이 이 하나의 작용을 말함입니다. 그래서 1단계, 2단계... 라고 말하는 것에는 하나도 차이가 않나는 것입니다.
이름과 뜻을 따라가는 것은 분별심이지 공부가 아닙니다. 공부란 분별되지 않는 그 한물건을 분명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분별하지 않는 반야에, 마음에 딱 있으면 오히려 온갖 분별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됩니다.
아나함 이란 말은 불래,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만, 실제로는 돌아오지 않는게 없다... 그래서 이름을 아나함이라고 한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가서 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감도 없고 옴도 없다는 말입니다.
걸어 간다는 것과 온다는 것은 걷는다는 사실로는 똑같은 하나이기에 실상을 말하는 것이고, 실상은 역시 무상이기에 정해진 모양이 없는것 입니다. 그래서 쓰고자 하면 쓰는 것이고, 쉬고자 하면 쉬는 것입니다.
아나함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오고 가는 말에 따라 나타낸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왜? 부처가 되었는가?
얻을 바 법이 없기 때문에 부처가 되었다..(이무소득고....)
있는 그대로... 내가 배워서 얻지 않은 것, 노력해서 얻지 않은거... 그것이 진리 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실상인 것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실로 아라한 이라고 이름 붙일 그런 법은 없습니다."
아라한이라고 하면, 깨달은 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자, 도를 얻은 자, 성자...인데, 이런 말은 그저 이름일 뿐 이지, 실제로 그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실상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분별심과 망상이 쉬어진 자를 말하고 있기에...
결국 성인의 지위에 들어간다는 말은 말과 모양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자리에서 분별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오직 마음자리,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태완님의 선으로 읽는 금강경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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