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스크랩] “행복ㆍ편안함 누리고 사는 자리가 해탈” (대원스님)

희명화 2011. 11. 3. 09:31

“행복ㆍ편안함 누리고 사는 자리가 해탈”
선지식을 찾아서-대원 스님(오등선원 조실)


대원 스님은 1957년 상주 남장사로 출가 윤고암 스님을 은사로 하동산 스님을 계사로 득도수계하고 상원사 동화사 해인사 통도사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계룡산 제석골에 위치한 학림사에 들어서면 선불장(選佛場)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학림사는 출가수행자들의 수행처인 오등선원과 재가자들을 위한 오등시민선원이 나란히 있는 ‘부처 뽑는 도량’인 것이다. 오등선원에 눈 밝은 이가 있어 불꽃 튀기는 진검승부를 겨루어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많은 수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눈 밝은이가 휘두르는 활인검에 살아나간 이가 몇이나 되는지 누가 알까 마는 그 칼날에 베이고 싶은 사람들은 태산처럼 여여부동한 대원 스님을 찾아온다.

사람들은 한 때 ‘남진제 북송담’(부산 해운정사의 진제스님과 인천 용화사 송담스님을 두고 선지식으로 존경하는 뜻에서 일컫는 말)을 말했다. 이제 대원스님을 덧붙여서 ‘중앙에는 대원스님이 있다’고 한다. 공부인으로서 진검승부 끝에 얻어낸 명성인 만큼 오등선원에는 진실로 깨닫겠다는 수좌들이 방부를 들인다. 대원 스님은 깨우침에 있어 조금의 숨김도 없이 자신의 공부를 낱낱이 드러내어 제접하기에 ‘남진제 중앙대원 북송담’이라는 말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1986년 옛 제석사 터에 학림사를 세우고 납자를 위한 오등선원과 시민선원을 열어 현재 선불교 대중화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대원 스님의 거처는 선승의 거처답게 소박하고 단출했다. 대원 스님의 방에는 용성 스님과 고암 스님의 영정사진이 걸려있다. 용성 스님의 법맥을 이은 분이 고암 스님이고 고암 스님의 법맥을 이은 분이 대원 스님이다.

대원 스님은 남장사에서 행자 시절을 보냈다. 먹물 옷을 입은 스님이 지나가면 그저 좋아 줄레줄레 따라다니다 학업도 채 마치지 못하고 들어왔으니 주지 스님의 말씀 한마디가 그대로 법인 줄 알았고, 강사 스님의 가르침 또한 귀히 여겨 한글귀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 해야 되는 줄 알고 오년 동안 일주문 밖을 나가지 않고 공양주를 비롯하여 채공, 갱두까지 도맡아서 했다. 대원스님이 오년동안 행자노릇을 할 때 500여명 정도가 왔다가는 도망갔을 정도였으니 그 힘든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지스님은 쌀 두말을 주면서 5일 동안 먹으라고 했지만 절 집안의 대중이 일정치 않아 들쑥날쑥하였기에 항상 쌀은 모자랐다. 그럴 때 마다 주지스님은 쌀을 어디다 감추었느냐면서 야단을 치고는 한겨울에도 밖으로 내몰았다. 이런 어려움을 견디어 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행자는 대근기”라 칭찬했다. 대원 스님은 공부가 높은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컸다.

“여러 번 강원을 보내달라고 청했지만 일만 시키고 보내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생각다 못해 사미계를 받고는 걸망을 매고 도망치다시피 해서 청암사로 갔어요. 청암사에서 고봉 스님으로부터 사집과 선요를 배웠는데, 그때 경안이 조금 열리데요.”

그 후 통도사에서 성능 스님과 호경 스님께 사교를, 대교는 혼해 스님께 배워서 내전을 두루 다 익혔다.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 잠을 아껴가며 공부했다.

1966년, 혼해 스님을 모시고 선어록과 금강경 강의를 들으며 용맹정진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혼해 스님께서, ‘전백장(前百丈)은 불락인과(不落因果)라 하여 여우 몸에 떨어졌고, 후백장(後百丈)은 불매인과(不昧因果)라 답하여 전백장이 여우 몸을 벗어나게 해주었는데, 불락인과라 답한 것이 어찌해서 여우 몸에 떨어졌는고?’ 묻는 겁니다. 사집(四集)에 있는 말 아니냐면서 어찌나 다그치시는지...”
이 물음에 망연자실하여 한 생각에 빠졌는데 사흘 밤과 낮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다시 혼해 스님의 “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느니라.”는 말씀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일게(一偈)를 지어 바쳤다.

크게 한 소리에 하늘땅이 무너지고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었네.
거연히 한걸음 나아가 머리를 돌이켜보니
산은 드러나고 시냇물은 곡 밖으로 흐름일세.
(大喝一聲倒乾坤 日月星宿失光明 遽然一步回頭看 露山溪水谷外流)

혼해 스님께서 게송을 보시고는 “대원수좌는 강사하지 말고 선방에 가서 열심히 참선수행토록 하라”고 일렀다. 그 길로 곧장 의정부 쌍룡사의 전강 스님을 찾아뵙고 참선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대원 스님은 불안해하지 않고 멋지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은 내 마음의 고향인 마하반야에 이르는 것이며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참선이라 했다.


“하나의 화두를 의심해 나아간다는 것은 생과 사에 대한 의심, 본래 부처에 대한 의심 등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을 하나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해결되면 모든 의심이 일시에 없어지게 되어 있어요.”

공부를 지음에는 이러한 의심이 없이는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의정을 돌이켜 과연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를 늘 반성해야 한다면서 화두참선에 대한 병폐를 짚어주었다.

“화두공안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아서 타파하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조사 공안을 사량으로 알려 하면 안되요. 화두를 깊이 관하는 것은 내 자성을 바로 보고 깨닫기 위함인데, 화두에 집착하는데 떨어져서 화두를 가지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화두를 받아서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가지고 있는 이놈을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어 매어 놓으려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염불하기 위해서 ‘아미타불’과 같은 부처님 명호를 받아놓고 ‘아미타불, 아미타불’하면서 끊임없이 붙들고 잊지 않고 염불하는 것과 같아요. 본인들이 생각 안하려 해도 안 할 수 없을 정도로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간절하게 물어야 해요. 의정삼매(疑情三昧)에 들어서 기연이 닿을 때에 일대사를 마치게 됩니다.”

대원 스님은 선방에 다닐 때도 조실 방에 가서 열심히 묻고 점검 받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상원사, 범어사, 송광사, 칠불암 등 전국의 제방선원에 안거하면서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모시고 입승 및 선덕 소임을 맡아 경책을 받아가면서 30년 세월을 선수행으로 일관했다.

대원 스님은 고암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던 당시를 회상했다. 고암 스님은 3대, 4대, 6대 세 번이나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분으로 자비보살로 통하고 있는 분이다.

1973년 고암 스님이 해인총림방장으로 머물 때에 저녁 정진을 마치고 방장실을 찾으니 “지금도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가, 몇 년이나 참구하였는가?” 하고 공부의 진척을 물으셨다. ‘8년간 참구하였다’는 답을 듣고서는 “애석하다” 하시면서 한 말씀 일렀다.

“잣나무 꼭대기 위에서 손을 놓고 한 걸음 나아갔을 때에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이겠는가?”

대원 스님은 이 한마디에 홀연히 크게 깨우쳐 박장대소했다. 이에 고암 스님은 “무슨 기특한 일이 있길래 그렇게 웃는가, 속히 일러라.”하고 재촉했다. 삼배를 올리고서 “설사 천언만구(天言萬句)를 다 이른다 해도 이 속에 있어서 상신실명(喪身失命)합니다.” 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 앉았다. 다시 고암 스님이 마조원상 공안(公案)을 물었다.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더니 “여기에 들어가도 30봉(棒)이요, 나가도 30봉이니 일러라.”고 했다.

“깔고 앉았던 좌복을 머리에 이고서 ‘이것이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아니야’하시며 주장자로 나를 치려고 하시는 찰나에 좌복을 스님 머리 위에 던지고 문밖으로 나가 버렸지. 잠시 후에 다시 들어와 앉으니 고암 스님께서 ‘눈 푸른 납자는 속이기 어렵도다’하시고는 1700공안을 두루 물으시데요.”

1700공안에 대한 답까지 다 해마치고서 고암 스님께 오도송을 지어 올렸다.

홀연히 잣나무 꼭대기에서 손을 놓고 반걸음 나아가라는 말을 듣고
확연히 의심 덩어리가 녹아 무너졌네.
밝은 달은 홀로 드러나고 맑은 바람은 새로운데
늠름히 비로자나 이마 위를 활보함이로다.
(忽聞栢頭手放語 廓然銷却疑團處 明月獨露淸風新 凜凜闊步毘盧頂)

이렇게 해서 대원 스님은 고암 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다. 자신의 전 존재를 담아 낸 질문 앞에서 자신의 일체 생명을 걸고 답하는 진검을 겨누는 그 자리에는 한 치의 빈틈도 있을 수 없다. 스승의 날카로운 취모검은 제자의 마지막 번뇌의 주라발을 베어 버린다. 삼세제불의 향기와 비교해도 일호(一毫)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천 가지 파도 속에서도 전혀 간섭받지 않고 순풍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며 싸움하는 속에 가서도 어깨춤을 출 수 있어야 깨달음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평상심이 도’라고 했듯이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이뤄져야 한단다. ‘마음이 본래 부처’란 말이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듣고 바로 알 수 있다면, 그 소리 하나 듣고 남전이나 원효, 육조 스님처럼 현실성 있게 살 수만 있다면 공부가 필요치 않단다.

“부처님 말씀을 예로 들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 사람을 좋은 마음으로 도우는 것이 선(禪)’이라 했어요. 여러 모로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그것이 바로 선이라는 것이지. 일체중생 모두가 다 이런 마음으로만 산다면 이렇게 앉아있을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이가 부처 마음으로 사는데 그 위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어요. 우리는 말로는 알아도 실제로 그렇게 안 되니까 부득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놓으라 해도 안되니 ‘이 뭣고’하며 살펴보라는 것이지. 천 가지 파도 속에서도 전혀 간섭받지 않고 순풍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며, 싸움하는 속에 가서도 어깨춤을 출 수 있어야 깨달음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중생들은 ‘상대방이 폭언을 하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마음이 당장 따라 일어나 버리니 좌복 위에서 마음을 조련해야 하는 것이다.

납자에게는 선지식이 곁에 있어야지 혼자의 생각으로 공부를 지어가는 것은 위험하단다. 서울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서울을 간다고 할 때 도중에 대구 같은 큰 도시가 나오면 휘황찬란하니까 그곳에 주저앉을 수 있다. 서울의 궁전까지 가서 제8아뢰야식을 박살낸 경험이 있는 선지식이라면 자신 있게 천하의 도인이라 할지라도 점검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대원 스님은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은 다 깨달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본인이 생사를 걸고 정진을 하다가 기연이 되어서 스승을 만나 가지고 깨달은 분도 있지만, 많은 선사들이 부처님 경이나 조사 스님 어록을 통해서 깨달았다”면서 선수행과 함께 경전이나 선어록을 공부해야 진척이 있음을 강조했다. 스님은 무구자(無垢子)도인의 <반야심경 주해>를 강설하고 책으로 펴내어서 선가에 일대 <반야심경> 열풍을 일으켰다. 오등선원에서는 십년도 훨씬 넘게 토요일마다 대원스님의 강설이 있고 강설이 끝나면 밤새워 용맹정진을 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대주선사어록>과 <증도가>강설이 있었고 지금은 <금강경 오가해> 법문을 매주 토요일마다 하고 있다.

사람들은 때로는 ‘당장 눈앞에 감원조치를 당해 언제 해직될지 몰라 조마조마하면서 사는데 무슨 선을 하라는 것인가? 참선한다고 해서 감원조치를 안 당할 수가 있는가?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나? 왜 현실성 없는 참선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하고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대원 스님은 이런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다.

“중생은 단지 살기 위해서 살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돈을 벌지 않으면 이 생명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다툰다고 하지만, 짐승들도 고기 한 점을 두고 서로 다툴 줄 알고 이 육체를 살찌울 줄 압니다. 그런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서 되겠어요? 모든 경계에 부딪쳤을 때 둥글둥글 원만하게 다 소화를 시키고 걸림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 자신에게 있는 문제성을 녹여 없애야 합니다. 반야지혜는 자기 자신이 문제성을 벗겨내요. 마음속에 쌓여 있는 자기 자신의 모든 불만을 지혜의 빛으로 녹여야 합니다. 본래 면목을 바로 깨달아 인생을 지혜롭게 살고 최상의 행복과 영원한 편안함을 누리고 사는 자리, 그 자리를 해탈이라 합니다.”

대원 스님은 ‘불안해하지 않고 멋지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은 내 마음의 고향인 마하반야에 이르는 것이며,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참선’이라 했다.

줄 없는 거문고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길을 안내해주시는 대원 스님께 감사의 예를 올리고 나오니 봄 햇살이 가득하다.

따뜻한 봄바람이 우주 법계에 불어와서 그 기운이 흰 꽃과 푸른 잎으로 모양을 나타내 보이는 것. 그러니 흰 매화꽃을 볼 때 꽃만 보지 말고 우주 법계에 꽉 차 있는 봄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약력
1957년 상주 남장사로 출가. 윤고암 스님을 은사로 하동산 스님을 계사로 득도수계. 1961년 하동산 스님에게 구족계 수지. 고봉, 석능, 혼해, 호경 스님으로부터 일대시교를 이수한 후 혼해 스님에게서 전강 받음. 그 후 상원사, 동화사, 해인사, 통도사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정진. 고암 스님으로부터 전법. 1986년 옛 제석사 터에 학림사를 세우고 납자를 위한 오등선원과 시민선원을 열어 현재 선불교 대중화에 전력.

현대불교신문 www.buddhanews.com

문윤정 논설위원(수필가) | un82@buddhapia.com

2009-03-09

출처 : 求道歷程(구도역정)
글쓴이 : 푸른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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