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동계(參同契)와 초암가(草庵歌)
자료 : 월간 불광, 2001년 12월호
글· 현각스님|한국 선학회 회장, 동국대 선학과 교수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법을 이은 제자는 43인이라 한다. 그 가운데 흔히 청원행사(靑原行思)·영가현각(永嘉玄覺)·남악회양(南嶽懷讓)·남양혜충(南陽慧忠)·하택신회(荷澤神會) 등 5인이 정통 제자로 일컬어진다. 이 가운데 이번 호부터는 이들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청원행사 계통을 이은 석두희천의 『참동계(參同契)1)』를 비롯하여 영가현각의 『증도가(證道歌)』와 하택신회의 『신회어록(神會語錄)』의 순서로 진행하고자 한다.
『참동계』의 저자인 석두희천(石頭希遷)은 청원행사의 법을 이었다.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은 단주(端州)의 고요(高要) 사람으로 진씨(陳氏)의 후손이다. 출가하여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에 나아가 육조혜능을 뵈었으나 구족계를 받기 전에 혜능이 시적(示寂)하였다. 그래서 혜능의 유언대로 청원행사에게 나아가 수행하여 그 법을 이었다.
석두는 이후 천보년간(天寶年間, 742∼756)에 형악(衡岳)으로 가서 남대사(南臺寺) 동쪽에 대(臺) 같은 반석 위에 암자를 짓고 좌선하였다. 여기에서 석두화상(石頭和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790년 12월 6일 세수(世壽) 91세 법랍(法臘) 63세로 입적하였다. 탑명(塔銘)은 견상(見相)이다. 이후 목종(穆宗)이 무제 대사(無際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석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우선 『참동계』와 『초암가(草庵歌)2)』 등을 들 수가 있다. 『참동계』는 모두 5언 44구 220자로서 짤막한 글이다. 그러나 『참동계』 이후 조동종지(曹洞宗旨)의 하나인 상호(回互)와 부상호(不回互) 원리의 원류(遠流)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이것은 본래 화엄의 도리로서 모든 것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개개의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의 원리를 말한 것이다.
『참동계』라는 제목은 그 명칭을 위(魏)나라 백양(伯陽)이 쓴 『참동계』 3권의 선서(仙書)에서 따온 것이다. 백양의 제목의 뜻을 보면 천(天)·지(地)·인(人)이 참(參)이고, 그것이 하나로 합하여 가없는 것을 동계(同契)라 하여 그 원리를 자연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석두희천의 『참동계』는 그와는 다르다. 단지 말만 빌렸을 뿐 그 내용을 완전히 바꿨다. 곧 석두의 『참동계』에서는 뜻을 오직 불법의 대의인 만법일여(萬法一如) 연기무생(緣起無生)에 두고 있었다.
『참동계』라는 제목이 보여주고 있는 세 글자는 전편(全篇)의 대의(大意)를 나타내고 있다. ‘참(參)’은 참호(參互)·교참(交參)·참잡(參雜)의 의미로서 삼라만상(森羅萬象) 사성육범(四聖六凡) 등 일체가 각각 차별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동(同)’은 합동(合同)·화동(和同)·동등(同等)의 뜻으로서 일체가 현상으로 보면 각각 천차만별이지만 본체로 보면 추호도 차이가 없는 제법평등(諸法平等)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계(契)’는 계합(契合)·증계(證契)의 의미로서 앞의 ‘참(參)’의 차별현상과 ‘동(同)’의 제법평등이 상호간에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묘용을 나타낸다.
이리하여 ‘참(參)’은 차별적인 만유현상의 모습으로 상(相)을, ‘동(同)’은 그 현상의 이면에 깔려 있는 본체로서의 근본을 말하는 체(體)를, ‘계(契)’는 이러한 차별현상과 그 동일성으로서의 본체를 상호(回互)와 불상호(不回互)의 원리로 수용하는 차별즉평등(差別卽平等) 평등즉차별(平等卽差別)이라는 만법의 묘용(妙用)으로서의 용(用)을 나타낸다.
이처럼 그 제목은 일찍이 백양(伯陽)이라는 선인(仙人)이 천지만물의 체(體)·상(相)·용(用)을 설하여 선술(仙術)을 닦아 천지의 본체에 계합하려고 쓴 『참동계』 3권에 의한 것인 만큼 석두(石頭)는 언어는 옛 것을 빌렸으나 그 골자는 일체만유가 일여연기(一如緣起)로서 무생(無生)한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석두(石頭)는 이러한 만법평등의 원리에 입각하여 당시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는 두 종파 사이의 배격을 일소(一掃)하고 평등일여(平等一如)의 대도(大道)를 천명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 『참동계』의 상호 불상호의 사상은 이후 조동종의 오위사상(五位思想)의 원리적인 근거가 되었다.
또한 『초암가』는 안빈낙도하면서도 그 유위(有爲)에 떨어지지 않는 선사의 초탈한 심경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글이다.
참동계(參同契)
東西密相付 東西로 은밀하게 서로 부촉한다.
人根有利鈍 사람의 근기는 영리하고 둔한 것이 있지만
道無南北祖 도에는 남북의 돈점이 없다.
靈源明皎潔 신령스런 근원은 밝고 맑은데
枝派暗流注 枝末은 그윽하게 흐른다.
執事元是迷 事에 집착하는 것은 본래 미혹이고
契理亦非悟 이치에 계합하더라도 그것은 깨침이 아니다.
門門一切境 육근의 일체경계는
回互不回互 回互도 하고 또 不回互도 한다.
回而更相涉 回互하면 다시 涉하고
不爾依位住 그렇지 않으면 제자리에 머문다.
色本殊質象 색은 본래 형질과 모양을 달리하고
聲元異樂苦 소리는 원래 즐거움과 괴로움을 떠나 있다.
暗合上中言 어둠은 上言과 中言에 합치하고
明明淸濁句 밝음은 淸句와 濁句를 분별한다.
四大性自復 사대의 성품이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은
如子得其母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火熱風動搖 불은 뜨겁고 바람은 움직이며
水濕地堅固 물은 축축하고 땅은 단단하며
眼色耳音聲 눈은 색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들으며
鼻香舌鹹醋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본다.
然於一一法 그러나 각각의 법은
依根葉分布 근본과 지엽에 두루 의존한다.
本末須歸宗 그러나 그 근본과 지말도 궁극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尊卑用其語 貴賤을 가리지 않는다.
當明中有暗 밝음 속에는 본래 어둠이 있으니
勿以暗相遇 어둠이라는 相으로 헤아리지 말라.
當暗中有明 어둠 속에도 또한 본래 밝음이 있으므로
勿以明相覩 밝음이라는 相으로 찾으려 하지 말라.
明暗各相對 밝음과 어둠의 관계는
比如前後步 마치 걸음걸이와 같아서 서로 앞뒤가 없다.
萬物自有功 만물은 스스로가 功能이 있는 바
當言用及處 작용으로서의 動과 分處로서의 靜이 그것이다.
事存函蓋合 비유하자면 현상적으로는 函과 蓋가 들어맞고
理應箭鋒 원리적으로는 창 끝과 칼 끝처럼 빈틈이 없다.
承言須會宗 요컨대 언어를 통해서 종지를 얻어야지
勿自立規矩 말끝이나 쫓아서는 안 된다.
觸目不會道 눈으로 보고도 도를 모른다면
運足焉知路 발걸음이 어찌 목적지를 알겠느냐.
초암가(草庵歌)
吾結草庵無寶貝 내가 풀을 엮어 움막을 하나 지었는데 치장 하나 들이지 않았다.
飯了從容圖睡快 여기에서 밥 먹고 나서는 조용히 잠을 자니 참으로 가뿐하구나.
成時初見 草新 막 지어놓고 보면 지붕에 얹은 띠풀이 새것처럼 보이지만
破後還將 草蓋 사그라들면 다시 그 위에 새로운 띠를 얹는다네.
住庵人鎭常在 초암에 깃들어 사는 사람 영원을 딛고 살면서
不屬中間與內外 중간이나 안과 밖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네.
世人住處我不住 그리하여 세상사람이 사는 곳에 나는 살지 않고
世人愛處我不愛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네.
庵雖小含法界 초암이 비록 좁디좁지만 법계를 다 머금고 있어
方丈老人相體解 방장 큰스님이 거동하기에 불편이 없고
上乘菩薩信無疑 최상승보살도 옹색하지 않음을 믿는다네.
中下聞之必生怪 그러나 중하근기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問此庵壞不壞 초암이 언제 무너질지 궁금해 묻는다네.
壞與不壞主元在 무너지건 무너지지 않건 본래부터 주인은 그 곳에 있으면서
不居南北與東西 남북이나 동서에 치우쳐 따로 머물지 않는다네.
基上堅牢以爲最 초막이 자리한 터는 견고함을 최상으로 삼고
靑松下明窓內 푸른 솔 아래엔 밝은 창이 나 있어
玉殿朱樓未爲對 궁전과 누각에 비할 바 아니라네.
衲 頭萬事休 몸에 걸치고 머리에 두른 것 모두 던져버리니
此時山僧都不會 바로 이 때는 내사 모든 것 알 바 아니라네.
住此庵休作解 이 초암에서는 온갖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니
誰誇鋪席圖人買 뉘라서 법석을 열어 납자를 제접한다 하리오.
回光返照便歸來 회광반조하여 도리를 깨치고 보면
廓達靈根非向背 신령스런 근원에 통달하여 긍정과 부정을 초월한다.
遇祖師親訓誨 눈 밝은 조사를 만나 친히 가르침을 받아
結草爲庵莫生退 홀로 암자 지어 퇴굴심을 내지 않으면서
百年抛却任縱橫 한 평생 없는 셈치고 수행하여 뜻을 얻으면
擺手便行且無罪 손 놓고 일 없어도 어그러지지 않는다네.
千種言萬般解 천만 가지 온갖 알음알이와 분별심은
只要敎君長不昧 다만 참학인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임을 몰라서는 안 된다
欲識庵中不死人 초암에 살고 있는 깨친 사람을 알고자 하거든
豈離而今遮皮袋 어찌 지금의 육신을 떠나 다른 곳에서 찾으랴.
'명언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엽(落葉) - 레미 구르몽 - (0) | 2011.09.23 |
---|---|
좋은 도반 (0) | 2011.09.20 |
들꽃 (0) | 2011.09.16 |
산에 살며 읊조리다 - 김홍도- (0) | 2011.09.15 |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 (0) | 2011.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