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 수행
참선(參禪)이란 ‘선(禪)에 참입(參入)한다’는 뜻이다.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며,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를 음사한 것으로 ‘고요히 생각한다’
또는 ‘사유하여 닦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함’이라 정의할 수 있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참나’인 자성자리를 밝히는 데 있다.
‘본마음·참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세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든 일이 없이 완전하다. 이러한 청정무구심에 관해서는 사실상 말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비유를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볼 수밖에 없다. 그 일례를 들어보자면, 금강경에 관한 다섯 스님의 주석을 함께 모은 『금강경오가해』에 다음과 같은 야보스님의 게송이 있다.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불동)
月穿潭底水無痕(월천담저수무흔)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하나 남지 않네.
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대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마당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아무리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과 섬돌을 쓸어내려도
마당 위의 티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아무리 움직인들 마당이 쓸려질 리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보름밤의 교교한 달빛이 저 맑은 연못 밑바닥까지 환하게 비추어 준다고 하더라도 물에는 달빛이 뚫고 지나간 자취가 남을 까닭이 없다. 이것은 비록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조금의 이지러짐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을 ‘본마음’이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도 한다. 참선은 이러한 자성청정심에 관한 확고한 믿음 내지는 인식 상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즉 내가 본래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한 나를 확인해 나갈 따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 참선의 자세 ]
참선수행을 한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좌선의 자세를 연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참선수행은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체의 사량 분별을 쉬는 데서 참다운 수행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종 가람의 입구에는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알음알이가 없는 텅 빈 그릇에 큰 도가 충만하리라
[入此門內 莫存知解 無解空器 大道充滿(입차문내 막존지해 무해공기 대도충만)]’ 는
글귀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알음알이를 쉰다고 하는데, 그러면 알음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머릿속에 간직해 온 온갖 지식과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던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던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분별이 모두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이다.
참선을 하는 데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환경이 조용한 곳이 좋겠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이다. 참선의 자세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걸림 없이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전통 수행법인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 것이 좋다. 결가부좌와 반가부좌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위를 정리 정돈한 다음 좌복을 깔고 그 자리에 편하게 앉는다.
둘째, 앉는 자세는 먼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셋째,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넷째, 허리와 양어깨는 편한 상태로 쭉 펴고 두 손은 먼저 왼손 등을 오른손 위에
포개어 올려놓고 엄지와 엄지를 살짝 마주 닿게 하면 된다.
이 자세는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 데 적합하다.
그러나 초보자는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고통이 따를 수 있으므로 힘이 든다고 여길 때는 몸을 움직여서 굳은 자세를 유연하게 풀어 줄 필요가 있다. 익숙해 질 때까지는 약 30∼5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려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이때는 아쉬워 말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經行)이라 한다.
이때에도 화두를 잊고 잡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반가부좌는 결가부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결가부좌 자세에서 다리를 한 쪽만 다른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놓는 자세이다.
참선을 할 때는 호흡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냥 마음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참선할 때 호흡을 잘하면 정신이 집중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참선할 때 호흡은 단전호흡법을 취하되 단전호흡법에 머무르면 안 된다.
다음의 순서로 따라해 보자.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쉰 다음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 쉰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콧구멍의 미세한 털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
조용히 숨을 쉬어야 한다.
그리고 호흡은 아랫배 즉, 단전까지 내려 보냈다가
천천히 내쉬는 방법으로 계속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수행법 아님이 없다고 해서
기존의 수행법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수행법을 개발해서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을 배우는 사람은 전래된 수행법과 선지식의 말씀을 의지해서
수행법을 잘 익혀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자료 : 대한불교 조계종 신도교육신행>
[화두의 생명]
선은 철저히 상대적 개념의 세계를 떠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화두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이 때부터 의심해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화두에는 이성의 사유작용이 따라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 미궁과도 같다.
무문 선사의 말씀대로 마음의 길이 끊어지고 말길도 끊어져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것이다.
모색할 흔적과 자취조차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운거 도응(?~902) 선사는 말한다.
그대들은 영양을 찾는 사냥개가 영양의 발자취만 쫓아헤매는 꼴과 같다. 만약 영양이 뿔을 가지에 걸고 숨는다면 사냥개는 영양의 발자취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양의 숨소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영양이 뿔을 가지에 걸고 숨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6 곱하기 6은 36이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종적이 없다는 뜻을 모르는가?"
汝等譬如獵狗 但수得有縱跡底. 若遇羚羊掛角時 非但不見縱跡 氣息也不識.
僧便門. 羚羊掛角時 如何, 答曰 六六三十六. 曰會마. 僧曰 不會. 曰 不見道無縱
跡. - 「禪林寶僧傳」 券6 「道膺傳」 續藏經
이렇게 화두를 들 때는 종적조차 없어 생각으로 모색할 길이 완전히 끊어져야 한다. 여기서 사냥개는 각종 관념과 사유의 자취를 더듬으며 분별하는 인식 작용에 비유한 것이다. 간화선 수행의 핵심은 말과 생각의 자취가 끊긴 화두를 참구하여 종적이 사라진 곳에서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는 참선 수행자에게 모든 사유의 길을 끊게 하고 몸과 마음을 의심의 열기로 가득 차게 하여 마침내 그 의심의 둑이 툭 터지는 경지로 이끌어 준다. 이쪽도 허용하지 않고 저쪽도 허용하지 않고 부정해서도 안 되고 긍정해서도 안 되는 것이 화두 수행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것을 배촉背觸이라 한다. 조사관을 배촉관背觸觀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이렇듯 화두를 들면 온 천지가 하나의 의문 덩어리로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서장』에서 대혜 선사는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한다.
화두를 들 때는 평소에 영리하고 총명한 마음으로 헤아려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 헤아려 분별하면 십만 팔천 리도 아직 먼 곳이 아니다.
看時 不用將平昔 聰明靈利. 思量卜度 擬心思量 十萬八千未是遠. -『書狀「答徐顯模稚山」-
화두는 의식과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
알음알이의 한자말은 지해知解이다. 우리나라 절의 일주문에 보통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글이 붙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문 안으로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일주문을 들어설 때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야 한다. 비단 일주문에 들어설 때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그 의미를 간직하고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헤아리고 분별하는 마음이 아닌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에 몰입하고 나아가 그 화두와 하나가 되어 마침내 화두를 타파했을 때 활발발한 한 소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사관을 타파해야 온 천하를 홀로 거니는 대장부가 될 수 있다.
무문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대도는 문이 없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가면 온 천하를 당당히 걸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