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시 >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덩이와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빰에,
얼룩 진.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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