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 명시

심고 (心告) / 도종환

희명화 2025. 4. 9. 15:40

     

 

         심고  (心告)

 

     무엇하다 왔는고?

     시 쓰다 왔습니다

     시 쓰다 말고 정치는 왜 했노?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래, 세상은 좀 바꾸었나?

     마당만 좀 쓸다 온 것 같습니다

     깨끗해졌다 싶으면

     흙바람 쓰레기 다시 몰려오곤 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당신께서 못 바꾼 세상을

     저희가 십여 년에 어찌 바꾸겠습니까?

     세상일에 왜 간섭하고 싶어 했노?

     혹한이 깊어지면 봄 햇살로 간섭하고 싶어 하시듯

     땅이 메마르고 갈라지면 빗줄기 보내

     세상일에 개입하고 싶어 하시듯

     저도 그리하였을 뿐입니다.

     애썼다. 가서 꽃밭에 물이나 주거라

     제 영혼의 꽃밭에 물 주어도 될까요?

     겉 넘는 소리 그만하고 시키는 대로 해라

     말도 좀 줄이고

     할 말을 해야 할 때

     제대로 못하고

     잡다한 말만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나머지 날들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언제 네가 내 말 들었더냐

 

 

         도종환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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