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22 (100719) 노승은 골수조차 세우지 않아

희명화 2015. 4. 8. 21:33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가섭존자는 아난에게 법을 전하였다. 그렇다면 일러보아라. 달마는 누구에게 전하였는가?"
학승이 물었다.
"2조가 골수(髓)를 얻었다는 것을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2조를 비방하여서는 안 된다."
조주 스님이 거듭 말하였다.
"달마의 밖에 있는 자는 가죽(皮)을 얻고 안에 있는 자는 뼈(骨)를 얻었다는 말이 있다. 자, 일러보아라. 다시 안에 있는 자는 무엇을 얻었느냐?"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골수(髓)를 얻는 도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다만 가죽을 보고 알아라. 노승은 이곳에서 골수(髓)조차 세우지 않느니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골수(髓)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렇게 해서는 가죽조차 찾을 수 없다."

師示衆云 迦葉傳與阿難 且道 達磨傳與什麽人 問 且如二祖得髓又作麽生 師云 莫謗二祖 師又云 達磨也有語 在外者得皮 在裡者得骨 且道 更在裡者得什麽 問 如何是得髓底道理 師云 但識取皮 老僧者裡髓也不立 云 如何是髓 師云 如麽皮也摸未著

이 선문답은 3가지 주제가 차례로 드러나 있다. 첫째는 2조 혜가 스님이 무엇을 얻었는가에 대한 문답이다. 조주 스님은 이조 혜가 스님을 비방하지 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왜냐하면, 선사들은 대체로 무엇을 얻은 것은 없다. 어떠한 사실을 깨달았으나 깨달은 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화제은 무엇이 골수적인 법인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골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니 다만 가죽을 보고 골수를 깨우치라고 말하고 있다. 조주 스님은 골수조차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골수법인가? 선의 이치를 아는 자라면 원래 골수법은 있지도 않고 골수라는 말도 필요 없다고 설할 뿐이다.

세 번째 화제는 학승의 어리석은 질문에 질책을 주고 마치는 것이다. 앞에서 그토록 자세하게 골수에 대하여 말하여 주었건만 막판에 가서 또 "골수가 무엇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을 질책한 것이다. 그렇게 입이 닳도록 골수가 없다하여도 중생은 끝없이 골수에 집착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교정해준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그와 같이 당당하게 계시는 것이 화상의 바른 자리(正位) 아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을 수긍하지 않는 자가 있음을 아는가?"
학승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특별한 자리(別位)가 있다는 말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누가 특별한 자리(別位)에 있는 자인가?"
학승이 말하였다.
"누가 특별하지 않는 자리(不別位)에 있는 자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뭐라고 부르던지 그대에게 일임하겠네."

問 與麽堂堂 豈不是和尙正位 師云 還知有不肯者麽 學云 與麽卽別有位 師云 誰是別者 誰是不別者 師云 一任叫

여기서 말하는 정위(正位)는 바른 자리, 바른 자세, 바른 지위 등의 뜻이 있다. 별위(別位)란 정편(正偏)을 떠난 도(道)의 본래 자리를 말하고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안주하는 자리이다. 이 대담은 조주 스님이 법상에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부처님 같고 모든 성인 같은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학승이 조주 스님을 온당한 부처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담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자네의 그런 표현은 좋아. 평상시 내가 말하던 바와 같네. 그러나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일면 그것을 수긍하지 않는 자가 있음도 아는가?"하면서 "선의 깊은 곳에 들어가면 자네의 말이 틀리게 되는데 그 이유를 아는가?"하고 점검해 본 것이다. 그러자, 학승이 "그렇다면 별도의 자리(別位)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예리한 반론을 펼쳤다. "특별한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틀린 것인데, 노화상께서 지금 특별함을 주장하고 계십니까?" 하고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반문성 질문은 선사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다. 단 한 번의 행위로 막고 찌르는 것을 동시에 행하는 선객들의 전형적 질문이다.

그러자, 조주 스님 역시 오랫동안 경험이 풍부한 노화상이라. 학승의 공격에 쉽게 물러서지 않고 거듭 예리한 답변으로 반격하였다. "누가 특별한 자리에 있는 자란 말인가?"하고 점검을 가한 것이다. 그러자, 학승 역시 끝까지 왕자(王子)의 패기를 잃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특별하지 않는 자리(不別位)에 있는 자란 말입니까?"하고 반문하므로 써 바른 자리라든가, 바르지 않는 자리 따위는 원래 없지 않느냐고 일갈을 토한 것이다.

그때서야 조주 스님은 점검을 끝내었다. "그렇기는 하네만 그 자리는 무엇으로 불러도 좋은 거야."하면서 선사들의 자유자재하게 쓰는 경지를 엿보게 해주었다. 이러한 대담을 통하여 학승은 장차 후배와의 선문답에서 또한 자유로운 방편을 구사하게 하는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상상(上上)근기는 한 번에 문득 바꿉니다만 하하(下下)근기가 올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자네는 상상근기인가? 하하근기인가?"
학승이 말하였다.
"원컨대 화상께서 대답을 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주인공이 없는 것이잖아."
학승이 말하였다.
"저는 7천리 바깥에서 왔습니다. 막 다루지 말아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그렇게 묻는데 어찌 막 다루지 않겠는가?"
학승은 하룻밤 자고 곧 떠나버리고 말았다.

問 上上人一撥便轉 下下人來時如何 師云 汝是上上下下 云 請和尙答話 師云 話未有主在 云 某甲七千里來 莫作心行 師云 據你者一問 心行莫不得麽 此僧一宿便去

여기서 학인은 "하하근기가 올 때 선사는 어떻게 가르침을 주는가?" 그것이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지만, 조주 스님은 하하근기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부득이 자신이 하하근기라고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하여 직접 가르침을 주겠는데, 찾아온 객승은 자신이 상상근기인인지 하하근기인인지 밝히지 않고 있으므로 써 조주 스님은 더 이상 대담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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