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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질문하였다.
“대도는 뿌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표현해야 하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그대가 벌써 받아들여 표현하고 있지 않는가?”
학승이 질문하였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이미 뿌리가 없는데, 묶어 놓을 것이 어디 있겠는가?”
問 大道無根 如何接唱 師云 你便接唱 無根又作麽生 師云 旣是無根 什麽處繫
대도는 뿌리가 없다는 것은 대도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공감하는 말이다. 하늘과 땅이 있는 이상 대도는 넓고 크다, 그 어디에고 들어있지 않음이 없고 어디고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나 그 실체는 보이지 않고 뿌리 또한 없다.
따라서 사람이 질문하는 순간에도 대도는 나타난다. 사람이 움직이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산천초목이 가만히 서있어도 대도는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대도는 한계 지을 수 없고 가히 무엇으로도 묶어 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일 대도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그 쓰는 것에도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선사들의 방할과 즉문즉답이 화통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학승이 질문하였다.
“바른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도 귀신이 알아차려집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알아차린다.”
학승이 질문하였다.
“어디에 허물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허물은 ‘찾는 것’에 있다.”
학승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수행하지 않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수행해야 해.”
問 正修行邸人 莫被鬼神測得也無 師云 測得 學雲 過在什麽處 師云 過在覓處 學云 與麽卽 不修行 師云 修行
어떤 스님이 나이 60세가 넘도록 참선수행을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늘 참선 수행을 해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루는 저승사자가 나타나 이름을 불렀다. 스님은 저승사자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그래서 저승사자에게 7일간만 유예를 달라 부탁하였다. 죽기 전에 참선을 해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으나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였다. 사정을 듣고 난 저승사자는 7일간 유예를 주기로 하고 돌아갔다.
그후 스님은 열심히 참선 수행하였다. 이것저것 다 밀어 놓고 오로지 선정 삼매 하나에 몰두하여 열심히 수행하였다. 7일이 다될 즈음에는 드디어 적정삼매에 빠졌다. 마음은 고요하고 그 무엇에도 정신을 혼란하게 하지 않는 무념무심 삼매에 깊이 들어갔다.
저승사자는 7일 만에 스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스님은 방안에 없었다. 저승사자는 동서남북 사천하(四天下)를 낱낱이 살펴보아도 스님이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스님 찾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스님은 분명히 방안에 앉아있었지만, 저승사자는 스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귀신은 사람의 형체를 보고 식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식별한다.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면 귀신은 즉시 알아챈다. 그런데 스님이 무념무심에 들어갔기 때문에 저승사자가 찾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다.
만일 누가 올바르게 수행한다고 하여도 부처가 되려고 수행한다면 그는 귀신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부처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망상을 귀신은 즉시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행을 중지하여서도 안 된다. 마음이 부처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래 묶은 세인의 습성은 부처의 길을 가는 것에 방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수행하되 다만 과거의 행위만 고치려 해야지,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아무리 올바르게 수행한다하여도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보낼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화상께서는 ‘도(道)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말아라.’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염시키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안팎을 점검하여 보아라.”
학승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점검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점검한다.”
학승이 물었다.
“어떤 허물이 있어서 점검하십니까?”
“자네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問 和尙有言 道북屬修 但莫染汚 如何是不染汚 師云 檢校內外 云 還自檢校也無 師云 檢校 云 自己有什麽過檢校 師云 你有什麽事
조주 스님의 일관된 주장은 ‘수행하여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일상사에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법은 조주 스님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선사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만일 이 마음을 닦을 물건으로 생각하거나 닦아야 부처가 된다는 식의 가르침을 편다면 그것은 혜능 문하 남종(南宗)의 선법(禪法)이 아니다.
남종의 선법은 역사적으로 바른 법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여러 번 불교가 피해를 당하여도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왔다. 그 뿌리는 대승 경전에 두고 있고 특히 <원각경>과 <화엄경>의 ‘중생이 곧 부처’, ‘중생성불’ 이라는 부처님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육조 혜능의 선법은 깨달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닦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즉, 육조단경에서 나오는 오인돈수(悟人頓修)이다. 깨달으면 그 자체가 닦음도 마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수행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깨달은 자가 수행하는 것은 수행수행(修行佛行)이다. 부처의 행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육조 스님은 제자 법달에게 “네가 이제 깨달았으면 불행(佛行)을 수행하라.” 하고 분명하게 당부하였다.
여기 <조주록>에서도 조주 스님은 남전 스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100여세가 넘은 노화상이지만 아직도 점검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즉 돈오보림(頓悟補任)이다. 깨달은 자도 수행하지만 그 수행은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의 길을 잘 가려고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현재 한국에는 이 선법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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