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12 (100430) 달마가 전하려고 한 뜻이 무엇입니까?

희명화 2015. 4. 8. 21:29

 

 

 

 

 

 

 

 

조사가 서쪽에서 와서 전하려고 한 뜻이 무엇입니까?



물음 "이 일을 어떻게 가려내야 하겠습니까?"
조주 "나는 자네를 괴이하다고 생각한다."
학승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조주 "나는 네가 가려내지 못한 것을 괴이하게 생각한다."
학승 "그러면 보림(保任)하면 되겠습니까?"
조주 "보림(保任)하고 보임하지 않는 것은 네 스스로 살펴라."

問 此事如何辯 師云 我怪你 學云 如何辯得 師云 我怪你不辯 學云 還保任否 師云 保任不保任自看

이 일이란 '도를 얻는 것' '깨달음' '화두 타파' 등을 말한다. 가려냄은 탁하고 가변이 되는 것들은 모두 털어내고 진정한 골수를 얻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학승은 '어떻게 가려내야 진정한 법을 얻을 수 있는가' 질문한 것이다. 참과 거짓을 가려내고, 부처와 중생을 가려내고, 도와 도 아닌 것을 가려내는 것을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하고 물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뜬금 없이 "나는 네가 그렇게 묻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된다"하고 대답하였다. "가려내다니, 자네가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다고 더 가려낸다는 말인가?" 라는 반문성 힐책이다.

두 번째 질문은 학승이 못 알아듣고 거듭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너는 이미 가려내고 있어. 다만 가려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네가 이상할 뿐이야" 라는 가르침이다. 학승이 무엇인가 알아듣고, "그럼 여기서 보림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라고 재차 물었는데,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그것은 네가 스스로 나는 완벽한가 부족한가 살펴서 해라" 하고 말을 마쳤다.

이 문답의 요점은 스스로 완벽한 부처인데 그것을 모르고 학승이 가려낼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꼬집어준 것이다. 선은 진심직설이고 지름길을 가는 가르침이다. 다만 조주 선사는 스스로 그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은유법을 쓴 것이다. 선사들은 평이한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평범한 말은 사구(死句)이기 때문이다. "자넨 이미 부처야, 더 무엇을 가려낸단 말인가?"라는 식으로 하는 말은 죽은 말이다. 이런 말을 듣고 깨어나는 사람은 드물다.

질문 "지해(知解)가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조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問 如何是無知解底人 師云 說什麽事

지해(知解)는 아는 것을 말한다. 흔히 알음알이라고 한다. 진실을 알려면 아는 것을 버려야 한다. 사람이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하기 위하여 약속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결코 진리는 아니다. 예컨대, '높다'라는 개념은 실제 높은 것이 있어서 높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어서 사람은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 우주 바깥으로 나가서 지구 위에 서있는 사람을 바라보면 사람이 옆으로, 혹은 거꾸로 서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 '높다' 라는 말이 진실이겠는가. 이런 식으로 진리를 찾아들어간다면 세상의 그 어떤 말도 진실이 아닌 사람들의 약속된 언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잇을 것이다. 이런 알음알이가 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선문(禪門)에서는 아는 것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학승이 조주 스님에게 지해가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물었다. 학승은 선문에서 말하는 무지해자는 어떤 상태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현재 학승이 질문한 것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백치와 같은 사람의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확실하게 무지해자를 인지시켜주었다.

물음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와 전하려고 한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은 법상에서 내려 왔다.
학승 "그것입니까?"
조주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問 如何是西來意 師下禪床 莫便是否 師云 老僧未有語在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선문의 골수 법문을 말한다. 흔히 학승들이 묻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조주 스님은 선상(禪床)에서 내려온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선상에서 내려온 뜻은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겠으나 조주 스님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대답은 화두가 될 수 있다. 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번 탐구해 볼만하다. 여기에는 2중 3중의 그물이 쳐져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답을 찾아야 한다. 대략 7일 정도 탐구한다면 선사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답이 나올 것이다. 그 답으로 선사를 찾아가서 한번 법거래(法去來) 해 보기 바란다.

물음 "불법은 영원합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조주 "자네, 한번 생각 해봐. 옛날 전한과 후한의 천자들은 천하를 손 안에 쥐고 흔들었지만 임종할 때는 동전 반쪽조차 가지고 가지 못하지 않았는가."

問 佛法久遠如何用心 師云 你見前漢後漢把攬天下 臨終時半錢也無分

불법이 영원하다니, 그런 말 하지 마라. 불법을 불법이라고 부르는 이상 불법은 영원할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다 없어진다. 천하 영웅들이 세상을 쥐고 흔들어도 죽을 때는 동전 반쪽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한 줌의 흙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무엇을 영원하다고 말하고 있는가.

조주 스님은 불법은 영원하다면서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고 특별히 생각해 볼 필요는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다만 스스로 부처인 것을 깨닫고 의연히 부처의 행을 하다가 가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불법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어느 종교건 그것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곧 쇠퇴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불변의 법칙이다.

학승 "오늘날 사람들은 진귀한 보물을 존중합니다. 사문은 무엇을 존중합니까?"
조주 "당장 입 다물어라."
학승 "입을 다물면 되는 것입니까?"
조주 "만약 입을 다물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問 時人以珍寶爲貴 沙門以何爲貴 急合取口 學云 合口還得也無 師云 口若不合爭能辨得

세상 사람들은 진귀한 보물을 귀하게 여기지만, 출가한 사람은 무엇보다 침묵을 귀하게 여긴다. 진리를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진리에 다가가면 갈수록 말할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도(道)를 아는 사람이라면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다. 입을 열면 도는 멀리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道)를 표현할 기회인데도 매번 침묵할 수는 없다. 설사 침묵하고 있다고 하여도 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조주록>에서 매번 기이한 행동과 은유ㆍ비유를 섞어서 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속에서는 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겠지만, 세속에서도 침묵이 때로는 진귀한 보물이 될 수 있다. 남의 어려운 사정은 가능한 배포하지 말아야 하고, 시기 질투하는 말도 할 필요가 없다. 또 가능한 욕설ㆍ시비는 삼가 해야 하고 미워하는 말도 잠재워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내부에서 잊어버린다.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마다 그 생각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에 더 각인되어 더욱 잊혀 지지 않는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은 가능한 잊어버리고 사랑하고 기쁘게 해주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돌변하게 된다. 이것이 세속의 법칙이다. 세속을 살기가 더 어렵다. 세속은 도를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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