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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가?
물음 “하루 24시 중에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조주 “자네는 하루 24시간에 쓰임을 당하고 있지만, 노승은 24시간을 사용하고 있어. 자네는 어느 시간에 대하여 묻는 것인가?”
問 十二時中如何用心 師云 你被十二時使 老僧使得十二時 你問那箇時
시간에 쓰임을 당하는 사람은 경계에 이끌리는 사람이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하고, 기쁨을 기쁨이라 하고, 분노를 분노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시간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다. 도를 깨달은 선사들은 슬픔, 기쁨, 분노는 없는 것으로 알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선사는 시간을 사용하지 이끌려 살지 않는다. 선사는 나아갈 때 나아가고 나아가지 못할 때는 나아가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도 성급하지 않고 차분하게 순서대로 해나간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선사를 놀라게 하거나 슬퍼하게 하지 못하니, 선사는 시간에 이끌리지 않는 것이다.
도를 깨닫지 못한 사람도 시간에 이끌리지 않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천만에 말씀이다. 24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앎에 대하여 큰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다. 적어도 영혼이 깊이 깨어날 정도의 각성이 일어나야 가능해 지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확 바꿔져야 한다.
물음 “학인의 본분사는 어떠한 것입니까?” 조주 “나무가 흔들리니 새가 날아가고 물고기가 놀라서 뛰니 물이 흐리다.”
問 如何是學人本分事 師云 樹搖鳥散魚驚水渾
여기서 학인의 본분사를 물은 것은 근원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다만 학인으로써 하여야할 직분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 예컨대, 주부로서 하여야할 일, 남편으로서 하여야 할 일, 공무원으로서 하여야할 일, 학생으로서 하여야할 일과 같이 사람이 당연히 하여야 할 어떤 의무적인 것을 묻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자못 엉뚱한 듯한 대답을 하고 있으나 잘 생각해보면 이 보다 적합한 대답은 또 없을 것이다.
‘나무가 흔들리니 새가 날아간다.…’고 표현한 것은 학인은 학문에 매여 있는 단계이므로 아직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경계라는 것이다. 학인은 그른 것에 대한 분노가 있고, 옳은 것을 신봉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매사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학인으로서 하여야 할 일은 그 무엇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야 하고, 어떤 일을 당하여도 거기에 물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원래 가지고 있는 무한히 자유로운 부처의 심성을 드러내는 것에 최선을 다하여야 하고, 잘못 알아오고 물들었던 거짓의 세계에 유혹당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학인이 하여야 할 일이라는 메시지이다.
물음 “무엇이 백치입니까?” 조주 “노승은 자네보다 못하네.” 학인 “저는 노스님을 이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조주 “자네가 어찌하여 백치가 되었는가?”
問 如何是少神底人 師云 老僧不如你 學云 不占勝 師云 你因什麽少神
질문자가 백치(白痴)에 대하여 묻자, 조주 스님은 “노승은 자네보다 못하네.” 하고 말함으로 써 “백치는 나 같은 사람이야.” 라는 뜻으로 답변한 것이다. 그러자, 질문자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해도 저는 노스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였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자네가 백치인 나보다 더 못하다니, 그렇다면 자네야 말로 백치군.”하고 대담을 마친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은 다 백치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선(禪)은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와 같은 상태가 되라고 가르친다. 정신에 물리적인 충격을 가하여 백치가 되라는 것이 아니고 멀쩡한 정신에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정신만 없애버려서 마치 백치와 같이 하얀 바탕을 드러낸 상태가 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보가 되어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진리의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인생의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
물음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을 꺼릴 뿐이다.’ 라고 하는 말을 요즘 사람들이 안주처로 삼더군요.” 조주 “전에도 누군가 나에게 물었는데 지금 5년이 지났으나 아직 주소(註疏)를 달지 못하고 있네.”
問 至道無難唯嫌揀擇 時時人窠屈 師云 曾有問我 直得五年分疏不得
도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하는 마음, 즉 사랑과 미움을 선택하고, 부자와 가난을 가리고, 잘 난 자와 못난 자를 구별하며,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없애면 이미 도에 들어간 것이라고 3조 승찬 스님은 말하였다. 그런데 사실 간택하는 마음을 버리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한번은 진리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 설법을 듣거나, 불경 책을 볼 때 마음을 가다듬고 진심으로 기울여보라. 문득 한 소절에 깨달음이 일어날 것이다. 모든 선사들은 그렇게 단번에 깨달아서 부처의 마음을 회복하였다. <신심명>에 나오는 삼조 승찬 스님의 이 법문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관리 “단하 화상이 목불을 태웠는데 어찌하여 원주 스님의 눈썹이 빠졌습니까?” 조주 “귀관의 댁에서 산 것을 요리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관리 “머슴입니다.” 조주 “그것 참 좋은 솜씨를 가지고 있군요.”
有官人 問 丹霞燒木佛 院主爲什麽眉鬚墮落 師云 官人宅中變生作熟是什麽人 云所使 師云 卻是他好手
석두(石頭) 선사의 제자 단하(丹霞) 천연 스님이 행각하다가 몹시 추운 날 어느 절에 찾아들어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너무 추워서 법당의 목불을 내려와서 군불을 지폈다. 지나가던 원주가 이것을 보고 노발대발하면서 “어째서 부처를 쪼개서 군불을 때는가?” 하고 다그쳤다. 그러자, 단하 스님이 말하길 “사리를 얻으려고 그랬소.” 하였다. 원주가 기가 막혀 하면서 말하길 “목불을 태워서 어떻게 사리를 얻는단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이에 단하 스님이 단호하게 말하길 “사리가 없다하니 좌우에 있는 부처도 마저 가져다 때야겠군.”이라고 말하였다. 그때 원주는 눈썹이 떨어져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관리가 이것을 들어 목불을 땐 사람은 단하 스님인데 눈썹이 떨어진 사람은 원주이니 무슨 이치로 그러하였냐고 물은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단하 스님이 솜씨가 좋았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주 스님이 “단하 스님의 솜씨가 좋았던 것이오.”하고 말하지 않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선은 주로 비유와 은유를 통하여 상대가 스스로 알게 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하지 직접적인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선은 단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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