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전 스님이 어느 날 방장의 문을 닫고서 문 밖에서 빙 둘러 재를 뿌리면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뭔가 말한다면 문을 열겠어.”
많은 운수승들이 한 마디씩 하였으나 어느 것도 남전 스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없었다. 그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창천(蒼天), 창천(蒼天).”
남전 스님은 곧 문을 열었다.
南泉便掩卻方丈門 便把灰圍卻問僧云 道得卽開門 多有人下語 並不契泉意 師云 蒼天蒼天 泉便開門
그 당시 문을 닫고 재를 뿌리는 풍속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짐작하기에 문을 닫고 재를 뿌리는 것이 그리 명쾌한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런 입장으로 본다면 남전 스님이 문을 닫고 재를 뿌리면서 한 마디 일러 보라고 한 것은 우울하고 어두운 방문을 어떻게 열겠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창천(蒼天)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푸른색으로 가득할 때 외치는 감탄사이다. 조주 스님은 다만 “창천, 창전!”이라고 외쳤을 뿐인데, 남전 스님은 문을 활짝 열었다. 창천이라는 대답이 마음에 들은 것이다.
창전은 우울하고 어두운 것과 반대되는 상태이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경쾌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전 스님에게는 이 대답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우울한 사람을 구제하는 정신 중에서도 창천의 사상이 근본적인 치유로 유도하는 가장 적합한 사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맑고 깨끗하다. 따라서 본성은 우울하지 않다. 혹 사람이 우울함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청명한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감정에 휘말려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우울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떻게 하든지 우울의 반대 상태인 창천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든지 주변 환경의 변화든지 상관없다. 사람의 본성대로 맑은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 이것이 우울함을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선적(禪的)인 처방인 것이다.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물었다.
조주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 지혜는 도가 아니다.’ 여기에 뭔가 허물이 있습니까?”
남전 “있다.”
조주 “어디에 허물이 있는지 부디 스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남전 스님은 조주 스님의 말을 따라서 하였다.
남전 “마음은 부처님이 아니다. 지혜는 도가 아니다.”
조주 스님은 불쑥 나가버렸다.
師問南泉云 心不是道智不是道 還有過也無 泉云有 師云 過在습麽處 請師道 泉遂擧 師便出去
마음이 부처이고 지혜가 도인 것은 불법의 정론이다. 그런데 마음을 마음이라 하고 지혜를 지혜하고 말하면 그것은 마음과 지혜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다. ‘마음’, ‘지혜’, ‘부처’, ‘도’ 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약속에 의한 명칭에 불과한 것이지, ‘마음’, ‘지혜’, ‘부처’, ‘도’의 실체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지혜는 도가 아니라는 말 또한 불법의 정론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 지혜는 도가 아니다’라는 말은 전혀 문제가 없는 표현일까? 이 또한 ‘아니다’라는 단정이 들어가고 주장이 들어간 것이므로 사람이 또 하나의 허상을 세운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표현도 맞는 표현은 아니다.
선은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조주 스님이 어디에 허물이 있느냐고 묻는 것에 남전 스님은 조주 스님의 말을 그대로 따라서 반복하여 말해봄으로서 제자가 틀린 곳을 스스로 알게 해준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조주 스님이 불쑥 나가 버린 것이 선(禪)의 묘미이다. 물론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만, 조주 스님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마무리를 할 수도 있었고, <조주록>에서 굳이 싣지 않아도 될 내용인데, 불쑥 나가버렸다고 기록한 것은 여기에 뭔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본 납자는 조주 스님은 선(禪)을 잘 아는 사람이라 남전 스님에게 감사 표현을 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까지 상기 11개의 선문답은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 휘하에 있으면서 스승 남전 스님과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도를 깨달은 두 선승이 문답한 것이라, 납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지만, 본 납자는 우둔하여 두 선사의 깊은 뜻을 다 파악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만 참고만 하면 되겠다. 이하는 조주 스님이 납자들을 접화(接化)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본격 내보인 조주 선사의 선문답이다.
조주 스님이 법당에 올라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이 일은 참으로 명백하다. 도량이 큰 인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일찍이 위산(潙山) 스님에게 갔을 때, 어떤 스님이 위산 스님에게 묻기를,
문승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위산 “나에게 의자를 가져다주게.”
라고 말하였으니, 만일 종사(宗師)라면 모름지기 본분의 일(本分事)로 사람을 인도하여야 비로소 얻게 할 것이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문승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문승 “경계로서 사람을 가르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주 “나는 경계로서 사람을 가르치지 않아.”
문승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師上堂謂衆曰 此事的的 沒量大人 出這裡不得 老僧到潙山 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潙山云 與我將床子來 若是宗師 須以本分事接人始得 時有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柏樹子 學云 和尙莫將境示人 師云 我不將境示人 云下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柏樹子
달마는 인도 변방 사람이었다. 혹은 서역 월씨국의 왕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달마 스님이 중국에 온 것은 부처님의 진정한 법문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두고 선문에서는 선(禪)의 중심적 내용을 물을 때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선의 핵심 사항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다.
본분사란 본질에 상통하는 것을 말한다. 조주 선사는 종사라면 사람을 지도할 때 항상 본분사로서 지도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야 사람이 바로 깨달아 들어가지, 공연히 몸통이 아닌 가지나 잎을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하다가는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과거 위산 스님이 본분사로 사람을 가르치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의 핵심을 묻는데, 위산 스님은 “나에게 의자를 가져다주게.” 하고 가리켰고,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가리켰으니,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조주 스님은 분명 잣나무라는 나무(境界)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한 의도가 무엇인가를 탐구하여야 할 것이다.
‘뜰 앞의 잣나무’는 유명한 화두이다. 만약 자신의 참 모습을 알고 싶다면 이 화두를 들고 참구하면 된다. 혹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알려고 하는 사람도 이 화두를 들고 수행한다면 틀림없이 어느 날 홀연히 트일 날이 있을 것이다. 화두는 반드시 풀린다. 불교는 답이 없는 것을 찾으라고 헛된 일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많은 선사들이 이 화두로 삶의 피곤한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으니 이 화두는 바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만약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나에게 묻는다면, “빈손으로 온 것을 환영해.” 라고 대답할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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